은혜의 영성

제6과  승리는 선물입니다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승리는 싸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그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그분의 삶을 사시도록 할 때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5장4절)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가동되는 전능한 “발전소”를 우리 안에 갖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영적 축전지를 충전해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셀교회 지침서는 제가 목회하는데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안 후에 이 사실을 어떻게 나눌까 고민하였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 프로그램을 나누는 것보다 더욱 성경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민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서 이 진리를 나눌 수 있을까요? 잡지를 보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책이 너에게 답을 제시할 것이다. 그래서 랄프 네이버가 쓴 셀교회 지침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나서 회중에게 이 책을 인용하여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셀교회가 얼마나 성경적인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나서 6개월 후에 셀교회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전에는 양면이 있듯이 거기에는 메시지가 있고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메시지가 필요하고 성경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성경적인 메시지가 방법이 없으면 들려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메시지가 없고 방법이 있다면 거기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메시지는 성경적인 메시지이고 나누어야만 하는 메세지입니다. 셀들이 율법주의에 빠진다면 셀들은 암에 걸린 것입니다.

바울이 갖고 있었던 가장 큰 고민과 문제는  교회 안에 있었던 율법주의였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미 존재했던 율법주의에 관해 쓴 것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율법주의에 빠지는 교회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한 서신입니다. 풀정 목사님이 엔씨디를 통하여 많은 책들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빌 길햄이 쓴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가에 대한 책도 있습니다. 다른 책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에 관한 성경적인 정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성경을 여러분의 진리의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더 신사적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더 신사적이었는가 하면 그들은 성경을 보면서 왜 그런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저를 믿지 마십시오. 성경을 믿으십시오. 신학교를 믿지 마십시오. 성경을 믿으십시오.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를 믿지 마십시오. 성경을 믿으십시오. 제가 말씀드리는 것 중에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제거하십시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이 성경 안에 있으면 성령을 초대하여서 여러분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신분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을 때, 제가 이미 준비했던 훌륭한 설교를 다 버려야 했습니다. 그 설교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면 성숙되는 데 우리가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새로운 메시지가 아닙니다. 처음 이 메시지를 들었을 때는 새로운 메시지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만 새롭게 들려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를 많이 받아들여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으면 그것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체계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거부합니다. 현실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너무나 작습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베뢰아의 사람들처럼 성경을 매일 연구하여야 합니다. 율법에서 자유한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나에게 계시하였을 때 저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세계의 어느 곳에 가 보아도 이 메시지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곳은 없었습니다.

셀에서는 두 가지를 꼭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신분과 율법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에 대하여 배우고 율법에서의 자유에 대하여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됩니다. 율법에서의 자유만 가르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을 배우지 않으면 그들은 방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으로 갑니다. 어떤 사람은 방종으로 갑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입니다. 어떤 이가 복음을 정확히 전한다면 내가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라.’ 어거스틴이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해도 될까요? 이런 사람을 청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설교를 할 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루터 선생님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마틴 루터가 대답하길 “내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너에게 묻고 싶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순간에도 성령께서 이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주고 계십니다. 성경에 근거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면 가서 교인들을 종교에서 해방시키십시오. 율법주의에서 해방시키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의 손 안으로 인도하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1. 죄의 권세

만약에 믿는 자들이 이미 완전한 의를 성취했다면 왜 아직도 죄를 범합니까? 신분을 확인한 이후에 완전한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죄를 안 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믿는 자의 본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죄를 지을까요? 6과에서는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육신 안에 있는 죄의 권세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1) 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긋지긋한 존재입니다.

먼저 육신 안에 있는 죄의 권세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아무도 죄가 없는 자처럼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새로운 자세가 있습니다. 죄는 믿는 자들에게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죄를 보면 그것은 튕겨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죄에 대하여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죄 안에서 먹고 마셨던 우리 자신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거기에 대하여 반응을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율법을 중심으로 한다면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죄를 지을 것입니다. 삶의 스타일이 답답함과 절망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안에서 살 때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16-23)

① 죄를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성입니다. 사도바울이 죄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을 보십시오. 죄가 강하게 튀어나가지 않습니까? 그는 죄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죄를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싫어하는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믿는 자가 죄를 싫어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고도 죄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 그것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당연한 듯이 살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삽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성령께서 슬퍼하기 때문에 내적인 갈등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슬퍼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죄를 사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랑합니다. 하루는 나에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나를 너무나 증오합니다. 왜냐하면 죄들이 내 안에 있고 그 죄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가만히 보니 자신을 증오하지는 않는군요? 전부 다 반대입니다. 자기를 증오하고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군요? 죄를 사랑하다고 하지만 죄를 미워하고 있군요?”죄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사랑할만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 대한 것입니다.

②단지 죄가 즐겁기 때문에 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목회할 때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죄가 여러분에게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에게 성경구절을 알려주면서 죄가 어떤 즐거움을 가져오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여러분이 죄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③죄란 그리스도인이 육신을 따라 살 때 드러납니다.

죄는 믿는 사람이 자기의 육을 따라 갈 때 죄가 나타납니다. 육이 무엇입니까? 살 껍질은 아닙니다. 육의 개념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예수를 떠나서 우리가 채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지 않고 우리의 삶을 우리가 이끌어가고자(manage) 하려는 것이 육입니다 우리의 노력을 기울여서 좋은 것은 최대화시키고 나쁜 것은 최소화시키려는 것이 육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내가 내 삶에서 그대로 사는 것이 육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죄의 본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가 행동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육 안에서 나타납니다. 죄의 근본적인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떠나서 내가 사는 것입니다 육이라는 것이 흉하지 않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은 나의 노력으로 살려고 할 때 크게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머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독단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이 육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의 영은 누구인가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여러분의 영은 의롭습니다. 여러분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여러분의 새로운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육과 옛 자아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옛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육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갖고 있는 지식인데 예수 없이 독단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육을 자꾸 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살 것인가? 육을 따라 살 것인가? 죄는 믿는 자에게서는 튕겨 나가게 됩니다.

2) 죄는 그리스도인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는 나의 몸의 지체 속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죄는 그리스도인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권세는 나의 지체 속에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속받지 못한 육신 안에는 죄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아니지만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의 영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옛날의 영은 나갔고 새로운 영이 왔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혼도 예수 안에서 점점 더 성화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몸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의 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변화된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갖고 있는 몸은 변화된 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의 권세가 우리 몸의 지체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니지만 우리의 안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우리 안의 죄와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나눕니다. 바울이 죄를 지었을 때 나는 악한자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7)

이제 죄를 짓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안 지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내 실수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죄를 지을 때는 그것은 본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7절에 ‘더 이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20절에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하는 자가 내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는 죄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의 죄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도 우리를 죄 짓게 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욕심에 따라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죄를 지을 때 그것은 우리의 본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자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한말을 기억합니다. 50먹은 남자가 ‘내가 고등학교 때 내가 제일 많은 골을 넣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고등학교에 있을 때에는 누구도 내 기록을 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도 운동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도 죄인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누구도 내가 살았던 것처럼 살 수는 없었다 라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아직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계속에서 당신은 성자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죄를 짓는 성자 성녀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된 동시에 타락하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두 가지 본성이 이제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가지 본성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경건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1)

사도 바울은 자기가 악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이 내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신분과 죄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바울이 어떻게 죄의 권세로부터 자신을 떼어 놓았는지 살펴보십시오.

-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 나는 내가 미워하는 바로 그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바로 그 일을 행합니다.

-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이 내 속에 존재합니다.

- 나는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바로 그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 악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 곧 내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 나의 속사람은 즐거이 하나님의 법과 일치합니다.

이 글을 보면 이 사람은 죄를 짓고자 안달하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가끔 죄에 물들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열정이 아닙니다. 어떻게 죄가 믿는 자 안에서 그렇게 오래 살 수가 있습니까?

죄의 권세는 생각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5)

저의 멘토이신 한 분이 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와서 속삭일 때는 처음에는 일인칭으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죄가 이렇게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기를 원한다.’ 죄가 들어오면서 목소리를 바꾸어서 내 생각인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 강대상은 크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작지? 내가 더 큰 강대상에 서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나에게 잘못하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하여야겠다. 그런데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되지.’

내가 서로 싸우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고 있는 죄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것이 아닌 생각이 여러분 안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생각을 통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떤 생각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주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내 것인지 주님의 것인지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답하기가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경건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원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불경건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경건한 생각이 여러분에게서 온 것은 아닙니다. 보통 생각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저의 생각 중에 어떤 것이 더 경건한 생각인지 말해 보십시오. 부흥회에 내 아들을 데려 온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야구게임에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둘 다 경건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경건할 수는 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아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가라, 이것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생각하기를 ‘야구 경기보다 부흥회에 데리고 가야지’하고 야구장에 가지 않는다면 이는 불순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 거하면 그가 우리를 통하여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의 마음이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 가운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실수를 범한다면 성령께서 실수를 밝혀주실 것입니다. 내 안에 죄가 있지만 그것이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왜 죄를 짓는다고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마침이 된 구속사를 믿지 아니할 때에 죄를 범하게 됩니다. 죄를 범하게 될 때 육이 커지게 됩니다.

2. 죄를 이기는 능력

1)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6:1-7)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칭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합니다. 1절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는다고? 이미 은혜가 우리를 덮어 버렸기 때문에 나가서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유혹받는 대로 살면 안됩니까? 아주 단순하지만 내 생각대로 살면 안됩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떻게 또 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을 때 그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우리가 죄를 이기는 권세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느 상태에 있는 가를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죄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죽음입니다. 죄와 연관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같은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율법과도 상관이 없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수긍을 하는데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면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두 가지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 큰 길이 있는데  점점 더 좁아지는 길입니다. 이 큰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로워졌다는 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길이 좁아집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줄어듭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둘에 대하여 아무 것도 관계가 없습니다.

죄는 결코 우리를 지배할 어떤 권세도 갖지 않았습니다.

죄가 우리를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죄가 나를 컨트롤하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까? 죄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권세는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거짓말이 뭐라고 말합니까? “넌 아직 자유하지 않았어, 넌 아직도 묶여 있어.”

서커스에 가서 기둥에 묶여 있는 코끼리를 본적이 있습니까? 몇 톤이 나가는 코끼리를 묵어놓은 말뚝을 봅니다. 묶여 있다 할지라도 충분히 뽑을 수 있습니다. 코끼리가 새끼일 때 큰 나무에 묶어둡니다. 아기 코끼리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묶어 놓습니다. 코끼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묶여 있을 때에는 마음대로 갈 수 없음을 인식합니다. 코끼리가 아주 크게 성장해서 트럭이라도 끌고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코끼리는 아주 작은 말뚝에 묶여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코끼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는 말뚝과 줄이 코끼리를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서 이미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죄는 여러분 안에서 더 이상 권세를 갖지 못합니다. 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 있을 때에는 죄의 거짓말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하고 싶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조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치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2)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

죄와 사망의 법은 우리를 부단히 자기만족적 생활방식으로 끌어내리고자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한 구절에서 두 가지의 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죄와 사망은 율법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미 해방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 지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묶여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②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을 능가하며 우리로 하여금 죄의 끌어내림을 이길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한가지 예화를 들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아주 높은 빌딩에서 뛰어 내렸다고 합시다. 많은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질문을 안 해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떨어졌는가?’ 입니다. 그 사람이 떨어졌으면 이것이 사실이기에 더 이상 이에 대하여 물어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이 뛰긴 뛰었는데 행글라이더를 탔다면 이 사람은 땅에 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중력의 법칙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바람에 의해서 나는 법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다면 여러분은 중력의 법칙이 아닌 바람을 타는 법에 의해서 날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을 때 중력이라는 법칙이 없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중력은 있습니다. 중력은 계속 있지만 여러분을 끌어당기지 못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죄가 우리를 끌어 당기려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할 때에 그것을 이길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는 자유케 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우리를 사망의 법으로 자꾸 끌어드리려 하는 죄를 이기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고 쉬십시오. 그리하면 그분이 이기게 하십니다. 그런데 행글라이더를 탄 사람이 행글라이더에 의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행글라이더를 놓는다면 그는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능력이 부여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꾸 떨어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마음을 그리스도께 집중시켜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죄를 생각하고 죄를 이기려고 합니다. 죄를 극복하는 방법은 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벌써 그것을 생각합니다. 죄를 생각하는 것이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그 때 그 음식은 계속 머리속에 있습니다. 이런 죄를 다시는 짖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죄를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생각을 죄에 두지 말고 그리스도에게 두어야지 죄를 이길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1-3)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까? 위에 것에 두어야 합니다. 마음을 죄와 땅의 것에 두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육신의 생각을 한다면 사망의 생각을 한 것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잠23:7)

우리가 육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육에 두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때 있습니다. 저는 한 때 농구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매일 농구를 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토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에 늦게까지 농구를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저에게 금요일에 농구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저는 절대로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져도 농구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금요일에 농구를 하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6살 때 교회에 갔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는 주일학교 뒤에 섰습니다. 그런데 저는 16살 때까지 여자 친구가 없었습니다. 제가 서 있는데 어떤 여학생이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 저는 황홀하여 졌습니다. 그녀와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데이트를 한다면 아빠 차를 써도 되겠습니까?”“너 진짜 여자친구가 있어?” “아직은 아니지만 제가 데리고 나가고 싶은 아이가 있습니다.” “누군데?” “지난 주에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온 여자 아이인데요!” 아버지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빠는 허락을 하셨습니다. 다음 주에 그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 주차장에서 서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너 금요일 뭐하니?”    “아무 것도 안해!”

“우리 금요일에 맛있는 것을 먹을까?”   “좋아!”   “할렐루야!”

그래서 금요일 날 그녀를 만나서 맛있는 것을 먹었습니다. 그날은 농구를 안했습니다. 그녀를 데려다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어!”  “정말 그래!”

“그러면 다음 주에 또 만날까?”     “ 그래 좋아.”

다음날 집에 있는데 친구가 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친구가 대뜸 하는 말이.

“너 어제 어디 갔었어? 금요일에 농구하는 것을 다 알고 있잖아!”

“미안해 이제는 농구할 시간이 없어, 사실은 나 여자 친구와 있었거든”

다음 주 금요일에도 안 나갔습니다. 매주 금요일 마다, 3년 동안 농구안하고 그녀와 만났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19살에. 지금 내 나이가 46세인데 장남의 나이가 25살입니다. 저는 지금 금요일 날 농구했다는 것조차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여자 친구가 나를 농구에서 구원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지요? 그것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씨름하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고 그분을 안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다른 것들은 생각도 안납니다. 다른 친구들이 와서 너 뭐하는 거야. 어디 있었어 질문합니다. “저리 가. 나 바빠.”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라 세상 모든 것들은 그의 얼굴을 바라 볼 때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교회에 가서 죄의 능력을 이기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증거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아름다움을 증거 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랑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죄들이 조그만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그분을 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에 감사 할 뿐만 아니라 이 놀라운 주님과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