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성

제3과  완전히 새로운 나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깨어짐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입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갖고 있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 의지하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고난과 깨어짐을 같은 것으로 보지 마십시오, 고난은 깨어짐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수는 있지만 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깨어짐은 나의 삶에서 나의 손을 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하여 하시고 자 하는 모든 것에 권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을 발견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1.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5:23)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은 세 가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 안에 3위가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3등분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시간과 공간으로 받아들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르지만 모여서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공간도 높이, 넓이, 깊이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모여서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만드실 때 3등분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선 사람을 3등분으로 만들었습니다.

1)인간은 육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몸을 봅시다. 몸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 고 있는 곳입니다. 몸은 여러분이 아니라 집일뿐입니다. 언젠가는 이 집에서 나갈 것입니다. 성경은 몸을 집이라고 합니다. 이 몸을 통하여 세상과 연관하고 있습니다. 촉감, 시각, 후각, 미각, 청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몸 안에 있지만 몸 자체는 아닙니다. 88세 되는 여성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노인으로 보지만 안에 있는 나를 보십시오. 나는 이 육체에 갇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답답합니다.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몸 자체가 아닙니다. 나는 이 몸 안에 죄수와 같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몸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입니다. 나는 미국인의 집에 살고 있고, 이분은 한국인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중국인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늙고 늙어 어느 날 없어질 것입니다. 이 집에 무너지면 우리는 나갈 것입니다. 사람은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인간이 혼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혼은 마음과 의지와 감정으로 되어있습니다. 혼은 다른 식으로 설명한다면 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성을 갖고 있지만 개성이 우리는 아닙니다. 개성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개성은 사회적인 기능입니다. 여러분과 관계를 갖는 것은 개성을 통하여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떠나면 어떤 사람이 스티브가 어떤 사람인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혼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기능을 합니다.

3) 사람은 영입니다.

가장 깊은 있는 무엇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영입니다. 사람은 영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람은 영인데 혼을 소유하고 몸으로 살고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강아지가 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혹시 개가 개성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내가 여기 와서 강아지에게 혼이 있다면 아니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강아지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내가 애완동물로 갖고 있는 강아지가 혼은 있지만 영은 없습니다. 미국에는 애완용 강아지를 많이 기릅니다.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있습니다. 그 강아지는 영은 없지만 개성은 있습니다. 내가 밖에 있다가 들어가면 나를 반깁니다. 가끔은 흥분합니다.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집에 왔는데 강아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강아지가 어디 숨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왜 숨어 있는지 압니다. 우리가 밖에 있을 때 분명히 잘못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짓을 벌려놨을 것입니다. 가끔 옷장에 숨어 있기도 합니다. 숨어 있을 때 그 강아지를 보면 그 강아지 안에서 움직이는 마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큰일났네’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나서 감정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움츠립니다. 혹시 밖에 버리지 않을까? 계속 어디에 숨을까를 찾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강아지는 개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강아지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아지를 너무나 좋아하여서 강아지가 천국에 갈 수 없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영입니다. 우리는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2. 인류의 정체성(본질)

인간의 신분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떤 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당신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당신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둘 다 틀렸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진리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발견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신분을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1) 정체성은 성취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어떤 때는 자기의 신분이 자기가 이룬 성취로 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수년간 목회를 통하여 성취한 것으로 나의 신분을 포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담임하는 교회가 성장하면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나에 대하여 실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잘하고 섬기고 큰일을 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취를 기초로 하는 행위는 하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세상의 방법입니다. 교회가 침체되고 있을 때에 나는 완전히 실패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성장할 때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성공과 실패가 여러분의 업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역과 삶에 있어서 성공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 결과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자의 이론으로 표준을 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표준을 세워놓고 이 위를 온전히 걸어가야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준을 보면 여기에 갈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을 바라보면서 누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감옥에 갇힌 바울을 보고 누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생각으로 누가 예수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성공이라는 것은 결과를 가지고 측정될 수 없습니다. 성공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셔서 역사를 하셨는가’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천국에 갔을 때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는 성공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지했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 하십시오. 그리고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시도록 여러분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침대에서 여러분의 머리를 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성공이다.’

성취를 기초로 한 행위는 정체성을 세우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하여 많은 일을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내가 할 행동을 결정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독교 종교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기독교 종교는 다른 종교보다는 다른 종교보다 나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관계입니다.

제가 태국 방콕에서 연결된 사람 때문에 인도 뉴델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비행기를 탔는데 젊은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인도 사람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한 다음에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입니다.”

“기독교 성경 말입니까? 나는 종교를 안 좋아 합니다”

그래서 나도 대답했습니다. “나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수많은 전쟁을 만들어냅니다.”

“맞아요. 교회 안에도 전쟁이 많아요.”

“기독교는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당신 직업이 무엇이라고 했죠?”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기독교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무슨 차이점이 있습니까?”

“크리스찬 종교는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슬렘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갖고 있는 관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시간 정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뉴델리에 착륙하기 전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하여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잘 이해했는지 살펴주십시오. 기독교 종교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여야 기뻐할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죠. 기독교는 예수가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것이죠. 그래서 들어오신 그날부터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사는 것 그것이 기독교이지요.” 그리고나서 이 인도 사람이 내가 29년 동안 한 번도 깨닫지 못한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전세계를 다니면서 기독교라고 말하는 종교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율법을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종교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그 때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년간 기독교 종교를 연습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종교적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형태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것은 하나님과 갖고 있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어디에 포커스가 있습니까? 행위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까? 저는 수년간 내 안에 있는 이 씨름에 묶여 있었습니다. ‘나는 성경책을 더 많이 읽어야 돼. 기도를 더 많이 하고 전도를 더 많이 하고 더 도와주어야 하고 사역을 많이 해야 해.’ 목마른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이러한 행위를 더 많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나를 만족시키기 보다는 나를 더 갈증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목말라 있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지만 마시고 난 다음에는 더 갈증이 났습니다. 그리고나서 계속 마시지만 갈증은 더 납니다. 이것이 종교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섬김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만족을 예수 안에서만 찾도록 디자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안에서 그분과 동행하면 여러분은 자연히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섬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넘쳐나는 은혜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계시하였을 때 저는 쇼크를 받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보다 사역을 더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0:38-41)

여기에는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섬기느라고 바빴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즐겼습니다. 40절에 보면 마르다에 대하여 나옵니다. 마르다는 분주하였습니다. 이 말은 방해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마음을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마리다의 포커스는 예수님을 섬기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 마리아에게 나를 도우라고 해주십시오.” 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나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택하였기 때문에, 더 나은 것을 찾았기 때문에 여기에 있다.”

제가 거기 안에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마르다는 맥베이 목사를 위해 봉사하고 마리아는 설교를 잘 듣고 있습니다. 그 때 마르다가 와서 “목사님 빨리 마리아에게 일어나서 나를 돕게 해 주세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네가 하는 봉사도 중요하지만 마리아가 하는 일도 중요하잖아. 네가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신앙생활이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지 않니. 섬기는 것도 중요하고 안식하는 것도 중요하잖아? 두 가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놀랍게도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까? 한가지만으로 족하다고 합니다. 한가지만 필요하다고 합니다. 한가지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봉사는 관계 속에서 넘쳐나는 기쁨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드리겠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하여 침대를 꾸미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어디 있니? 나는 몹시 목이 마르다.”

현대교회는 마르다로 꽉 찼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의 안식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안식하고 있다면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그를 섬길 것입니다. 섬길 시간과 안식할 시간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예수님 안에서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에너지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하여 복음증거를 하고 싶으신데 여러분이 기도를 하고 있다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성경을 읽고 있다면 지금 잘못된 장소에 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 안에서 우리가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명하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와서 ‘너는 참 열심히 하는 구나’라고 칭찬하실 것 같습니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강요한다면 율법주의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드린 것만큼 받으려 한다면 율법주의입니다. 우리가 하는 역할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보면서 사역해야 하는 것을 봅시다. 우리의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하루 종일 자연스럽게 기도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성경도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전파도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사람에게 전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 하는 모든 일에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할 때에 생명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공허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한다면 아무런 역사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가서 그런 식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회중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메시지를 먼저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우리가 성취한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틀린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합니다.

2)정체성은 관계에 의하여 세워집니다.

①이것의 가장 좋은 예는 결혼입니다. 미국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가지만 한국에서는 여성들이 자기의 성을 갖고 있죠. 결혼을 하면 둘이서 한 몸을 이룬 것이죠. 더 이상 나뉘어진 삶이 아닌 하나의 삶이지 않습니까? 성경은 한 남자가 떠나서 연합할 때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분은 둘이 하나가 된 신분입니다. 둘이 나뉜 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관계는 탄생입니다. 내 자녀들은 내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나의 분신입니다. 그들은 항상 나의 자녀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 관계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를 실망시킬 수는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관계를 안 하겠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옛날로 돌아가서 태어나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신부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떠나서는 신분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그의 가족입니다. 가족은 서로 닮습니다. 서로 닮고 같이 합니다. 아빠가 코가 크면 코가 크게 나옵니다. 눈이 비슷하게 생깁니다. 몸이 비슷합니다. 가족은 닮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닮은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합니다.

3.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묘사

1) 성경은 우리를 성도, 성자라고 합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1:7)

성도란 성자입니다. 신약에서 여러분은 63번이나 성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63번이나 성자라고 합니다. 지난달에 멕시코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과하마에 우리 본부가 있는데 그곳의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멕시코는 카톨릭의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카톨릭에서 지정한 성인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과하마에 모든 성인들의 동상을 갖다놓는다면 여러분의 상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성자와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는 성자처럼 살지 않습니다. 성자처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낌이 여러분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네 명을 키우다 보면 제가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항상 성자와 같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행동하는 것이 여러분을 나타내고 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여장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나를 여자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인가는 탄생에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성자라고 합니다.

2) 두 번째는 여러분은 의로운 백성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5:17)

우리는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는데 어떻게 받았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선물로 왔습니다.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의롭게 된 것은 의를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행한 것은 없습니다. 바로 그의 생명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그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여러분의 신분을 바꾼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었습니다. 영혼이 죄인이었기에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되었을 때 그 안에 성령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을 삶 속에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의롭습니까? 그분은 완전히 의롭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의롭습니까? 여러분은 완전히 의롭습니다. 여러분의 의가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 되었는데 지금은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여러분에게 들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5:21)

성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의롭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의롭게 만들어 달라는 기도를 제발 그만하십시오. 제가 만약에 박목사에게 “당신은 더 한국 사람이 되어야 돼. 기도 열심히 해서 김치를 더 많이 먹어서 한국 사람이 되어라. 네가 모르는 한국말을 더 배워봐.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기도해 봐. --- ” 한국 사람이 어떻게 더 한국 사람이 됩니까?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는 한국말을 다 몰랐겠지요. 태어나서 병원에서 김치를 먹지는 못했겠지요. 자라나면서 당연히 잘하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의로워졌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더 한국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라면서 더 성숙해질 수 있지만 더 의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의는 선물로 온 것입니다. 성경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의롭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하나님은 여러분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신적인 예술품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 가운데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만드신 후에, “진짜 멋있다. 나는 너무나 기쁘다. 내가 너무 잘 만들었다”고 표현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4) 우리는 거룩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3:16-17)

이 구절에 3가지의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경책이 여러분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죠.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성경이 당신을 거룩하다고 합니까? 그렇다면 나를 더 거룩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발견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지금 강대상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데요. 여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잠깐만요. 그런데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강대상에 올라가 계십니다. 강대상에 올라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올라가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여러분은 거룩하십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거룩해지려는 과정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는 “거룩하게 되기를 그만하십시오. 이미 거룩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4:24)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 자신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함과 진리와 영광 가운데서 창조되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삶 속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이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여러분의 삶입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린도전서6:17)

제가 쉬고 있을 때 녹차를 마셨습니다. 녹차를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녹차를 설명해 주고 싶습니다. 이 차는 뜨거운 물인데 녹차가 그 안에 있을 뿐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녹차입니다. 이것은 뜨거운 물 안에 녹차가 있다가 나온 것이 아닙니까? 녹차를 그 안에 집어넣었을 때 녹차의 뜨거운 생명이 물 안에 녹아서 물의 본질이 변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냥 물이 아닙니다. 새로운 신분을 가진 차입니다. 녹차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본질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들어 왔을 때 여러분을 완전히 변화시켰는데 여러분의 본질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자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내가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자이지만 때때로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자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 후서1:4)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본질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6)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표현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3:4)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여러분 거룩하십니까? 아멘. 정말 믿으십니까? 의롭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이것은 진리입니다. 내가 느낌이 어떤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4. 믿는 자들의 의에 대한 오해

의롭게 여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가 여러 가지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종종 믿습니다. 다음에서 의에 관한 잘못된 오해를 생각해 봅시다.

1) 진보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오해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난 다음 노력하면 더 의롭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1:30)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의를 너희에게 준다고. 바로 내가 의라고 말합니다. 내 생명을 너에게 넣어주겠다. 너의 본질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너는 나를 소유하게 되었다. 너는 의의 가문이 되었다. 예수님은 얼마나 의롭습니까? 100%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몇%입니까? 100%. 사도바울은 몇 % 의로웠을까요? 100%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신앙의 영웅들은 몇%일까요? 100%.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100%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들어가야 더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 갑니다. ‘의’ 안에서 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성화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이미 갖고 있는 의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의가 확실하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구원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성화입니다. 여러분이 영에서 혼으로 그리고 육체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보한 이후에 보여준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직유에 의해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나는 의롭지 않지만 하나님은 나를 의롭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간단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너는 의롭게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시면 여러분은 의로운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5:19)

2)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직위의 개념으로만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문자적으로 직위로만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해석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해석학에는 몇 가지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원리중의 하나가 원리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원리를 가지고 해석해야 합니다. 롬5:19절을 모십시오. 한 사람이 순종치 않으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위치적으로만 죄인입니까? 실질적으로 죄인입니까?

다음 구절을 보십시다.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실제적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이라면, 우리가 지적으로 인정하여야 할 것은 실제적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구절을 반으로 나누어서 이것은 실제적이고 이것은 실제적이 아니야 라고 말해서는 해석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예수 안에서 의롭습니다. 어떤 성경구절에 살아가면서 더 의로워지고 천국에 가면 더 의로워질 것을 이야기 한 성경구절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면 더 큰 죄인이 됩니까? 사람이 가는 곳이 그 사람의 어떤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는가가 사람의 신분을 확인합니다. 사람이 말로만 의롭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롬5:19절을 보여 주십시오.

3) 의에 대한 오해 중에서도 또 한가지는 고백에 의한 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계속 고백할 때 더 의로워진다는 오해입니다.

7과 강의에 가면 고백에 가면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만약에 고백이 의롭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여러분의 구원은 여러분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구원이 여러분의 행한 것과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선택하셨습니다. 성령을 주셔서 죄에 대하여 감지하게 되었고 회개의 영을 주시고 회개함으로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할 일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의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소명과 회개케 하심과 의가 선물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연합에 의한 의

어떤 사람은 “나는 의롭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이 의롭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 안에 있는 예수라는 다이아몬드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나를 보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신다고 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보기 때문에 나를 의롭게 보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냥 보면 못난 자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 보면 놀래고, 통해서 보면 볼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바로 당신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예수님을 보시는 것입니까? 나를 보시는 것입니까? 바로 나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를 보십니다. 예수님과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이야기로 이 강의를 마칩니다. 1930년도에 미국에 경제 공항이 있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인데 많은 사람이 재산을 날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택사스에 농부 한사람이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예인츠였습니다. 그는 공황이 다가 오자 은행의 이자를 갚지 못하고 가족을 돌볼 수도 없고 농장도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농장을 사려고 돈을 빌렸는데 갚지 못하여 농장을 압류 당하게 되었습니다. “공황으로 인하여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왜 나에게만 재촉합니까?” “미안합니다. 30일 내에 돈을 내지 못하면 은행에서 농장을 가져갑니다.” 그리고나서 은행원은 가고 그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는 농장을 잃어버릴 위기에 있었습니다. 돈을 내야 하는 그 날이 되기 며칠 전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는 석유회사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우리의 조사에 의하면 당신의 땅에 석유가 매장되어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번 파보아도 되겠습니까? 석유를 채굴할 허락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며칠 있으면 내 땅도 아닌데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다음날 사람들이 와서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그 날 8만 드럼의 석유가 나왔습니다. 예인츠씨가 상상할 수 없었던 돈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석유가 나왔고 더 이상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예인츠씨가 언제 100만장자가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땅을 소유한 그 때부터입니다. 어떤 사람은 석유가 나왔을 때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소유한 때부터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그는 왜 가난하게 살았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29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저는 가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유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