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성

제2과  새벽을 바라보는 어두움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무거운 짐들을 당신에게 짐 지울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장소(낙심된 장소)로 이끌려고 시도할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짐을 하나님이 져 주시기를 마침내 요청하기까지 당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더 큰 짐을 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깨어짐의 과정 속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자원을 다 소진하게 되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꼭 필요한 유일하신 자원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을 의지하는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율법주의에서 해방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어떻게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통과하기 위한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기적들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문의 이름은 깨어짐,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라는 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포기할 때 존재하는 조건입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기독교인의 삶이 쉽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정점에 와서는 기독교인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있는데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야 되지만 그렇지 못함으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약 예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수 있습니까?

제가 박노철 목사(통역)의 삶을 모방하려고 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이분의 행동을 관찰하고 이름도 한국 이름으로 바꾸고 스데반 박으로, 한국말을 배웁니다. 한국 음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으로 행동하고 머리 색깔도 바꾸고 해도 이 사람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모방해도 나는 한국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한국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죽고 다시 박씨로 태어난다면 한국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박목사의 삶을 모방할 수 없다면,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셔서 그의 삶에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낸 삶을 통해서 사시는 것, 그의 삶이 내 삶이 되는 것.

내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가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깨어짐 , 상한 심령을 통해서입니다. 내가 스스로 만족하려고 하는 마음을 언제 깨어버리십니까? 하나님의 도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 도구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고난입니다.

1. 우리의 삶에 있어서 고난의 현실

어떤 목사님은 기독교인은 고난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고난당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당한다면 절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십니까? 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의 감정과 반대되는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식과 반대되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느낌이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을 믿으십니까? 설교와 성경이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설교를 믿을 것입니까? 성경을 믿을 것입니까? 성경은 진리입니다. 성경이 상한 심령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4:12-13)

여러분의 삶 속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려움 당한 것을 이상한 일처럼 논해야 합니까? 성경은 놀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 어려움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그 계시가 다가온다면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을 때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하고 착각했습니다.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놀라운 기쁨을 가지고 그렇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말한 기쁨의 일은 천국이 아닌 이 세상의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영광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계시를 받으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기뻐할 것입니다. 이 계시가 어떻게 다가옵니까? 이러한 계시가 고난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자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도구로서 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 스스로 재 헌신해 보신 기억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이 그런 일을 해보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내가 있었지만 저는 그분을 위해 얼마나 많이 재 헌신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가장 밑바닥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원하는 내 자신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재헌신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 자기를 재헌신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약해진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발견하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용되기 위해서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사용받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약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강한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한 것을 인하여 더욱 자랑하리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로 다가 올수 있습니다.

1) 고난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기5:7)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욥기14:1)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16:33)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는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내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고난은 내가 한 일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난이 옵니까? 당신은 적어도 태어났잖아요. 사람이 태어났다는 의미는 고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2) 믿는 자들도 이 고난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상처와 아픔은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기23:1-9)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까?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의 느낌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적대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누르고 있다고 느낍니다. 자라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누르신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느끼고 있는 감정입니다. 욥과 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욥은 지속적인 절망감에서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그의 상황을 스스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환란과 격정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이 적대자로 서 있고, 내가 하나님께 직접 말할 수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바로 욥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욥이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숨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8,9절에 보니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좌를 봐도 우를 봐도 없었습니다. 뒤로 보아도 앞을 보아도 없었습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왜 안 계시는가? 이것이 바로 욥이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욥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0절에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느낌은 하나님이 그를 대적하는 것 같고 그를 누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이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으로 가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린도 후서1:8-9)

사도바울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성경을 믿으시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지금 사도바울은 굉장한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는 삶을 불살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이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닌 감당치 못할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의 문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절에 힘에 지나도록, 즉 내 능력 밖의 일을 주셨다고 합니다. 한글성경에는 내 힘에 지나도록 나의 고난의 짐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힘을 공급해주시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의 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을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나의 고난이요 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짐입니다. 이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잘 보시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짐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이해가 됩니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삶에 대한 완전한 절망입니다. 현대 성경을 따라서 이해해 봅시다.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내 능력 밖의 것이기에 내가 죽고 싶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사람 바울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다 죽어갑니다. 여러분 사역하시면서 여러분이 만지는 것마다 다 죽어 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목사로서 사역하는 여러분에게 목사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옵니다. 그 고난은 목사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든지 ‘예수님 차라리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할 정도까지 힘이 듭니다. 여러분이 만지는 것마다 죽음에 대하여 느낍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주셨을 까요? 왜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와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요? 9절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1:9)

사도바울은 신적인 뜻을 이행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 고난은 바울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모든 자신감을 상실하는 상태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이여 나에게 능력을 주옵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스스로 믿는 그것을 깨트리기까지 가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사명은 목회를 이 정도까지 키워놓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의 교회의 사역을 일으키는 것은 여러분의 사역이 아닙니다. 제가 담임목사를 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실수 했습니다. 제가 제 사역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나의 사역을 크게 세우라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들은 제가 사표를 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잘못은 제가 사역을 크게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반석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침범하지 못하리라. 여러분이 이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많은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무에 연결되어 있는 가지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그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을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복숭아 과수원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복숭아는 크고 탐스러운 고급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떤 나무는 작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작은 복숭아에게 가서 너는 창피한 줄 알아라. 너는 왜 저것만큼 크지 못했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두 복숭아는 자기의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바로 자기 나무에 연결되어 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마태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를 와서 매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하십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은 아주 쉽고 가볍다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하고 그분을 따른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도 그 사람을 죽을 때까지 때려 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안식이요,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게으르다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통해서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삶 속에 오셔서 내가 아주 무기력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실 사역에 대하여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나의 사역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눈에 보기 좋든지 나쁘든지,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교회를 세우시도록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제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빌립이라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주 화요일 마다 내 사무실에 와서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빌립은 아프리카로 돌아가서는 의료선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돌아가기 전에 맥베이 목사님이 말씀하는 만큼의 성경지식을 얻어 가기를 원했습니다. 6주간 성경공부를 하고 떠나기 전에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매주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저는 모든 말씀을 받아 적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아프리카로 가서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냐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바로 불어로 적었습니다. 불어로 적어서 바로 아프리카의 고향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편지는 동네의 추장이 매주 받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추장은 동네의 사람들을 다 모아서 그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질문들이 있는데 추장이 대답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장이 계속 편지를 보내오는데 자기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을 영어로 번역해 줄 테니 그 사람들에게 직접 답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틀란타 조지아에서 한 사람하고 이야기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생을 통하여 이루실 일을 예수님은 하루 만에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무능력을 시인하고 그분 앞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약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내가 강해질 주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더욱 약해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 고난의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을 왜 허락하실까요?

1)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모습을 노출시키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교회를 스스로 세워 보시려고 노력하고 계십니까? 저는 내 노력으로 교회를 세워보려고 했습니다. 언젠가 하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하나님이 아니잖아?’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통하여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의 능력과 의지했던 것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이었습니다.

육신이란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을 때 자기의 인생을 관리하려는 기술들에 견줄 수 있음이라, 그것은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육은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술을 안 마시기 때문에, 외도를 하지 않고, 훔치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적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분 자신을 의지하고 사는 모든 것을 육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두 형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탕자와 그의 형의 이야기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탕진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좋은 하모니를 이루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만족을 이루어 보려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가 먼 나라에 가서 살 때도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탕진했을 때 아버지가 화를 내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먼 나라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상해 있었을까요? 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슬퍼하신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마음이 상하신 것입니다. 그가 바로 육적인 삶을 따라 갔다는 것, 이것이 아버지를 슬프게 했습니다. 아들이 돼지치기가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그는 내 아버지의 종이라도 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종으로라도 나를 받아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기 전에 아버지에게 해야 할 말을 연습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나를 종으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나를 아들로 받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종으로라도 받아준다면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주님께 돌아올 때 내가 이제는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탕자가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보았습니다. 아들은 ‘나는 당신을 아버지로 섬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려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입을 막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송아지를 잡고 좋은 옷을 준비하고 가락지를 끼우라고 명령합니다. 아들이 연습한 말을 아직 꺼내지도 못하였는데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들인 것은 종으로 잘 섬기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가 아들이었기 때문에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이 관계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는 나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더 큰 교회를 멋있게 부흥시킨 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욱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너는 왜 들어오지 않니?”

“당신의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 돌아오니까 이런 잔치를 열어줍니까? 나는 수년 동안 아버지를 섬겼는데 이같은 잔치를 베풀어 준 적이 없잖습니까? 송아지를 잡아서 내 친구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인 적이 없잖습니까?”

큰 아들은 나의 섬김이 모자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장남은 자기가 열심히 했기에 당연히 잔치를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탕자와 같이 장남도 똑같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나 장남에 대하여 그들이 하는 일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그들을 사랑한 이유는 그들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그 정도로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릴렉스(relax)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를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사랑을 강하게 할 수도 없고 약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랑은 여러분의 행위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상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변할 수 있습니다. 타락할 수도 있고 신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육적인 삶은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육적인 삶이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육적인 삶을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술 취하고 방탕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보이는 육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술 취한 육적인 사람이나, 교회 안에 있는 율법적인 육적인 사람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육이라는 것은 내 능력으로 내가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두 개의 가지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선악과의 두 가지의 양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2:8-9)

이 나무는 선을 알게도 하고 악을 알게도 합니다. 이 나무에는 두 가지의 가지가 있습니다. 선과 악의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 보십니다.

어느 날 아침에 아담이 자고 있었습니다. 이브가 아담을 깨웠습니다.

“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지금까지 깨우지 않았어요! 여기 과일이 있어요!”

아담이 일어나서 화를 냈습니다.

“나를 깨우다니, 어떻게 과일을 갖다놓고 나를 깨울 수 있어! 이 과일로 나를 괴롭게 하려는 거지!”

그러면서 과일 접시를 던져버렸습니다. 하와는 숲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런 아담의 행동은 선한 것입니까? 악한 것입니까? 악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 모습을 모시고 기뻐하셨을까요? 아니지요. 나중에 아담이 후회를 하였습니다. 하와에게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일 잘 대해주고 여왕으로 만들어 줄께.”

그래서 다음날 하와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담이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여왕으로 대해줍니다. 그날 밤 하와는 아담에게 당신은 너무나 멋진 나의 왕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날 아담은 선을 행했습니까? 악을 행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아담의 행한 일을 보고 기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까? 첫날에는 좀 나쁜 일을 했지만 그 다음날에는 좋은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첫날에는 선악과의 악의 가지를 택했고 그 다음날에는 선한 가지를 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이틀을 통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틀 동안 선악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가지를 선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무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내가 율법주의자의 목사였을 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나쁜 행동을 그만두십시오,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안주머니의 담배를 갖다 버리십시오, 술을 그만 마시십시오. 아내에게 잘하십시오. 즉 행위, 행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이 살게 한 사람은 예수님이 그의 행위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규율과 법칙을 강조하지 않아도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행동이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바꾸시려는 것이지 가지를 바꾸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도를 가르칠 때 그들의 행위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신분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사랑의 관계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십시오. 나의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을 보게 하십시오. 그리고 아주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여 주십시오. 그들은 더 이상 규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더욱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계속 실패에 빠집니다. 그들을 자유하게 해 주십시오. 율법주의의 견고한 쇠창살을 깨 부십시오. 교회에서 진리를 말씀하십시오. 목사인 나도 그렇게 살수 없다고 하십시오. 그러나 누군가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왔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가 우리를 통하여 사실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하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버리십시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버리십시오.

2) 고난은 깨어짐을 위한 촉매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상한 심령, 깨어짐은 한 사람이 삶을 다스리는 자기의 능력 속에서 모든 신뢰를 포기할 때 존재하는 조건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16:25)

우리 중의 몇 사람은 이런 일을 꼭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의 손을 때십시오! 교회 사역에서 손을 떼십시오! 더 이상 나의 교회가 아님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모든 결과에 따라서 예수님만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내 손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다 가지십시오. 예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십시오. 내 삶이 여기 있습니다. 내 비전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개인적인 야망을 버립니다. 여기 내 삶이 있습니다. 내 삶을 사용하여 주십시오. 나를 잡아주시고, 내 삶을 어느 곳에든 사용하십시오. 내 삶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 이상 강해지기를 시도하는 일에 지쳤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나는 더 약해지기를 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1:26-29)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주옵소서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시죠. 그렇다면 고난이 올 때에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고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약하여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8살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저는 10살이 되었을 때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을 깨달았습니다. 16살 되었을 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극장이나 볼링장 주차장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19살 되었을 때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지만 19살에 목사가 된 것은 미국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19살의 나이에 얼마나 나이 들어 보이려 했는지 모릅니다. 머리에 염색도 해보았습니다. 제가 지역교회 담임목사로서 21년간 섬겼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 주님께서 너무나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남부 앨라바마에서 교회를 하였고 아주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우리교회만큼 빨리 성장하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문제나 이슈가 생길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왔고 저는 신문이나 방송에 나가기도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우리 도시에 음란서적을 들여오는 일을 맡았습니다. 저는 시의회에 가서 이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신문 일면에 저의 얼굴이 빌리 그레함처럼 나왔습니다. 그처럼 크게 써주실 기대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조지아 주의 어떤 교회 사람들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우리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시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제의를 이미 여러 차례 받았고 제가 거절을 하였습니다만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허락을 하였습니다. 주일날 다섯 사람이 왔고 그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내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는 것을 감지하였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그쪽으로 인도함을 느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섬기던 교회에서 제가 떠난다는 광고를 하였을 때 모든 사람들은 울기 시작하였고 나도 울었습니다. 나는 가기 싫었지만 하나님께서 가게 하였습니다. 떠나기 전날 자정 쯤, 모든 짐이 떠난 빈 방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 가족 모두는 차에 타고 조지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시를 빠져 나오는 데 거기에는 큰 플랭카드가 붙어 있었습니다. 몇 명의 교인들이 밤에 걸어 놓은 것입니다. ‘스티브 목사님 제발 마음을 바꾸세요.’ 나도 아내도 그것을 보고 함께 울었습니다. 좀 더 가다보니 플랭카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좀 더 가다 보니 또 하나의 플랭카드가 있었습니다. ‘제발 가지 마세요.’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마지막 도시를 눈물로 빠져나오고 고속도로로 올라가는 길에 ‘아틀랜타에 가시면 거기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목사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써있었습니다. 우리는 3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내내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지아에 들어갔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혹시 찰스 스탠리 목사님을 아십니까? 그분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유명하고 나도 존경하는 사람이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이곳에 왔으니 그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교회가 부흥하면 그 교회로 갈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교회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 심장과 영혼은 싱싱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3,4개월이 지나면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성장했는데 이교회는 왜 이럴까? 이교회는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을 모아놓고 이 도시를 구원하자고 하였습니다. 교회성장프로그램을 가져와서 열심히 하였습니다. 열심히 하였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 5년 동안 이 교회는 계속 감소하고 있었지만 내가 온 이후에도 그 감소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강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낙심하였습니다.’ 유명한 강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이 회중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나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로 안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목사가 앨라바마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앨라바마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척 힘들었습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일년이 지난 후 이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보고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년 후 보고해야 할 모든 통계는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어떻게 할지 몰랐습니다. 나는 분명히 회중들에게 보고하기로 했는데, 진실을 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1990년 10월 6일 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이 모든 통계에 대하여 보고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토요일이 지나가고 주일 새벽 2시경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무실 벽에 얼굴을 대고 울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마음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껏 울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정말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앨라바마에서는 교회가 잘 되었는데 여기서는 교회가 죽어가고 있잖습니까?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까? 교회를 죽이려고 데리고 왔습니까?’ 나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고소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내 삶의 전부를 드렸잖아요. 16살 때부터 메시지를 전했잖아요.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생각 속으로 왔지만 너무나 크게 들렸습니다.

“스티브야 나는 너를 원한다. 오직 너를!”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고 큰 교회를 일으키시려고 부르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보고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식모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부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그 음성을 듣고 나서 컴퓨터에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나의 기도를 적었습니다. 26쪽의 왼쪽에 있는 항목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겠다는 사항들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들은 나의 포기할 권리들입니다. 즐거운 환경을 가질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받아들일 권리, 성공해야할 권리, 결과를 보아야 되는 권리, 사랑 받아야 할 권리,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적고 나서 마지막에 부분에 와서는 내 삶은 마치 아무것도 적혀지지 않은 깨끗한 종이 같았습니다. 내가 스스로 기대고 있던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를 깨끗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일 밑에다가 싸인을 하고 날짜를 적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이러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에게 나와 함께 내 안에 나를 위하여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어떤 것이라도 허용하겠습니다. 나는 한 때 이 권리들이 나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권리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의 재량 안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1990년 10월 6일 날짜를 쓰고 내 이름을 서명하였습니다.

깨어짐이라는 것에 대하여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깨어짐의 장소에 와 계십니까? 아니면 사역들을 여러분의 손에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목사님들에게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결국 여러분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누구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는 깨어짐의 결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경영하려는 의지를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가르치려고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배가 고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황을 도와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힘을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더 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데이빗은 저의 막내 아들인데 지금은 21살이 되었습니다. 3살적에 한밤중에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아이의 방에 가보니 너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몰랐지만 병원에 빨리 달려가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가 어렸습니다. 아내는 나머지 3명의 자녀를 데리고 있고 나는 데이빗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장에 문제가 있어서 복통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숙변들이 떨어지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무척 아플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각한 병이냐고 물으니 심각해 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장 안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서 청소하는 방법과 무엇을 먹어서 해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 청소를 하자고 했습니다. 데이빗을 침대에 올리고 장에 무엇인가를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울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의사가 “맥베이씨. 이 아이를 꽉 잡아 주십시오.” 나는 아들에게 가서 두 팔로 아들의 두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의사는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데이빗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이 사람이 이렇게 못하게 해주세요. 아빠 이 사람을 멈추게 해주세요. 제발 너무 아파요 그만해요!”

한참을 그러다가 울기를 그친 데이빗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아빠 왜 저 사람을 말리지 않았어요?”

3살 난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어떻게 이해시키겠습니까? 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짓누르면서 “데이빗, 나만 믿어, 아빠를 믿어 이렇게 해야만 돼!” 제 삶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외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그만하세요. 그만 하세요. 왜 이것을 그만두지 않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에 대하여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비에서 고쳐져서 나오기까지 여러분을 깨뜨리고 깨뜨려지기 까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만큼만 그 자리에 둡니다.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옮기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이제는 끝장이야’라는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삶이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삶에 대하여 완전히 항복하는 지경까지 오셔야 합니다.

절대적 항복(롬12:1-2)

나는 완전히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나는 다음의 권리들을 포기합니다.

나의 영 즐거운 환경을 가질 권리

나의 의지 받아들여질 권리

나의 마음 성공해야할 권리

나의 감정들 나의 소유물의 권리

나의 몸 나의 환경으로부터 구조받을 권리

나의 환경들 결과를 볼 권리

미래를 향한 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알 권리

나의 가족 나의 환경을 이해할 권리

나의 꿈들과 희망들 바르게 증명되어질 권리

나의 과거의 성공들과 실패들 사랑받을 권리

나의 습관들 배우자와 자녀를 가질 권리

나의 문제들 하나님에 의해 쓰여질 권리

나의 관계들 내가 선택한 장소에서 살 권리

나의 재정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권리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셨고 지금은 하나님께 내려놓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권리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와 함께, 내 안에서 혹은 나를 통하여 원하시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시도록 허용하겠습니다. 나는 한때 이 권리들이 나의 것이라고 선언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권리들이 하나님께 속했으며 그분의 재량 아래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어떤 일이라도 기쁨으로 행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