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성

제5과  율법에서의 자유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많은 그리스도인이 삶에 있어서 모순이 드러나는 까닭은 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진실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율법은 “당신은 해야만 돼!” 라고 말하지만 반면에 은혜는“나는 하고 싶어”라고 말하게 합니다. 성경의 그리스도인의 경험들이 모두 율법에 기초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승리의 삶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의 신분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성취하여 얻는 승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거룩해지려는 시도는 육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주님과 함께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목적하는 것은 우리의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끝장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통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 노력하는 것에 마침표를 찍기 위하여 우리를 상한심령이 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상한 심령은 우리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분의 본질을 우리에게 직접 주셨습니다. 아담 안에 있던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고 만물을 소유한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살아가신다는 것을 상상하여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직접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내가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설교하는 것이 됩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나는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기도합니다. 내가 나의 사역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사역하신다는 것은 복된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사역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사역하시는 것을 원합니다.’여러분이 열 번을 더 사는 것보다 주님은 하루 만에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항상 항복하는 자세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 나를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나를 통하여 행하시옵소서. 나는 그 결과에 대하여 주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결과에 대하여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확인하여야 할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율법에서의 자유에 대하여 배우겠습니다.

1. 율법과의 결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서의 해방뿐만 아니라 율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율법주의자로 태어납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주의는 우리가 영적으로 깊어지려고 한다거나 우리가 행한 바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삶의 체계를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7:1-4)

롬7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결혼의 관계를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과의 결혼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결혼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율법과 결혼을 하면서 태어납니다. 율법씨와 결혼 생활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는 매우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의 행위가 완전할 때만 좋아합니다. 그러나 행위가 완전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우리가 잘하는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은혜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데 나를 인하여가 아니라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율법주의는 복을 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자꾸 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은혜 안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사랑이 행함의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것은 구약의 시내 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애굽기19:5)

만약에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내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옛 언약에 따라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새 언약 밑에서 삽니다. 놀라운 사실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옛 언약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새 언약을 선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선포해야할 새 언약이 무엇인지 찾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는 옛 언약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 언약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얽어매었던 옛 언약은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옛 언약 밑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일한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건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하늘에 신령한 모든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율법과 결혼하였다고 착각합니다.

1) 우리는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율법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을 때는 분명히 율법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담의 죄 안에서 율법과 결혼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율법과 결혼 한 것입니다. 이미 아담 안에 인류의 씨가 있었기에 그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모두가 범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씨와 결혼한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씨와 결혼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율법에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아직 율법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사는 것은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율법은 항상 정죄합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3:7-9)

바울은 율법을 죽게하는 의문의 직분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직분은 정죄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연관하여 생활하면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율법씨를 기쁘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쪽부분을 열심히 하여 만족케 하려면 다른 부분을 지적합니다. 율법씨가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항상 ‘더 더 더’를 말합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을 발견하기 이전에 율법주의자로 살고 있을 때 사무실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 성경을 많이 일고 있느냐?” “예!”

“너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안하는 것이 이상하다.” “저 기도합니다.”

“성경을 읽는 만큼 기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읽는 시간을 조금 빼서 기도에 투자를 합니다. 그러면 율법씨가 와서 말합니다. “너는 모든 시간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 사용하면 사역은 언제하느냐? 너는 이상하구나 너는 교회를 사랑하고 있지 않구나!”

그래서 기도와 성경과 심방을 하는 시간을 쪼갭니다. 그러면 말합니다. “너는 교회 안에서만 일하느냐? 사회의 일은 아니하느냐?” “저는 사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그래서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사역을 하고 사회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너는 왜 청소년들에게는 관심이 없느냐?” 이런 식으로 못하는 부분에 대하여 정죄를 당합니다. 이와같이 율법주의자로 사는 동안에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율법씨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율법주의로 사는 것은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어떤 수준에 이르지 못하여 늘 답답하고 고민하며 씨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렇다면 여러분은 율법씨에게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도록 결코 돕지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하여서는 비판하고 정죄하지만 우리를 도와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의사와 같이 병을 진단을 하지만 치료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열심히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해야 될 일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다 기록한 다음에 기쁨이 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답답하고 절망합니다. 종교적인 율법아래 사는 사람은 기뻐할 수도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승리를 주시려고 계획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옵니다. 그가 우리의 승리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3:21)

성경을 많이 일고 기도를 하고 전도하고 심방을 많이 하면 승리가 올 줄로 생각하지만 승리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합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이유는 이미 승리가 우리 삶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승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원수가 와서 ‘너가 잘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속이고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승리를 얻는 것이라면 승리의 찬양은 누가 받습니까? 내가 어제 기도를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예배가 영감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셨고 영광을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루 종일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너무나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맞아서 놀라운 일이 있어났다고 합니다. “네가 너의 일을 했다고? 그 결과로 너의 신용으로 받는다고?” “그래도 저는 열심히 했잖아요?”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느냐?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해 못하느냐 그것은 너 자신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아니냐? 우리가 설교하는 것은 너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이 아니냐?”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인정해 놓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것을 찾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광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복주시기 원하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때에 복이 무엇을 해줍니까? 그 복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줍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을 줍니다. 복음전도를 하고 싶은 마음을 줍니다. 설교하고 싶은 마음을 줍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입니다. 나는 수년 동안 종교적인 법칙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나는 회중들을 종교적인 법칙 아래서 살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 이것, 이것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칙들은 그들을 경건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씨는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씨는 정반대되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7:5)

성경을 보면 우리의 죄성을 더욱 충동질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충동질 합니까?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이 충동질 합니다. 율법주의적으로 설교를 하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이는 죄를 지으라고 격려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이렇게 율법적으로 설교하는 줄 모릅니다. 율법은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것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율법은 여러분들을 망하게 합니다.

제가 아내와 함께 박물관을 방분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강단이 있고 그 곳에 골동품과 같이 쇼파가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이 강단위에 올라가지 마십시오’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 강단이 이 가구를 놓을 정도면 내가 올라가도 안 부서질텐데. 그러고나서 올라갔습니다. 아내가 “무엇하는 거예요?”해서 내려왔습니다. 하 참 이상하다. 내가 왜 그 강단에 올라가고 싶어했을까? 그 경고문이 없었으면 올라가지 않았을 텐데. 이것이 바로 율법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제가 아틀란타의 기차역에 서 있었는데 거기에는 더 이상 그 안에 들어오지 말라는 선이 있었습니다. 안내문이 나오길 선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내 발을 보았습니다. 혹시 내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 세 명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발을 그 곳에 넣고 있는지 아십니까? 왜냐하면 스피커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 한번 해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갖고 있는 능력입니다. 율법 안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세우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율법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주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내 음성이고 내 말인데 원하느냐 그러면 가져라. 내 말을 듣고 싶다면 가져라. 이것은 선물이다 가져라. 그러나 악한 사단이 와서 이것을 율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님 보세요. 오늘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선물이요?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선물을 율법으로 만들어 꼭 읽으려 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읽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하면 무엇이든지 힘들어 집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라. 교통을 원하면 기도하라. 이것을 선물로 준다. 그러나 원수가 와서 이런 생각을 심어줍니다. 너는 꼭 기도해야 된다. 이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이것은 의무이지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율법주의만큼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교인 중에 위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어떻게 말해줍니까? 그가 아직도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의로워지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전혀 할 일이 없습니다. 의로워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예수가 나의 의입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그들로 인해서 의롭게 되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롭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들을 가르쳐 줍니다. 이전에는 누가 나에게 와서 의롭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 저는 그에게 리스트를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하십시오. 이런 리스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의롭게 되기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습니까? 이런 행위와 일들은 의를 얻은 사람들의 삶의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구약의 유대인처럼 살고자 합니다. 우리가 계속 노력하므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

2) 율법씨와 결혼했다는 것은 평생을 통하여 씨름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허망한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허망하게 의를 성취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9:30-32)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이방인들은 의롭게 되려고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의롭게 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행진을 합니다. 의를 성취하려고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여기라. 도적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의를 향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의롭게 되기를 바라느냐? 내가 의니라.” “그러나 예수님 나는 바쁩니다.” 탐심하지 말라. 이 모든 법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의다!” “예수님 비켜주세요. 나는 바쁩니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정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저 사람들과 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행하려면 기적이 필요합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거야. 기적이 필요한 거야. 나는 기적의 원천이다. 의를 원하느냐? 내가 선물로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방인들은 의를 받았는데 노력하지 않고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위로 받으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결단코 받지를 못했습니다.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옛 언약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여기에 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어야 하고 얼마나 기도를 하여야 하고 교회에 얼마나 전도하고 전도를 얼마나 하고 헌금을 얼마나 하는가.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왜 믿는 사람들을 붙들어 놓고 괴롭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거룩하라고 합니다. 현대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제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기를 통과하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쪽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는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지금 행하고 있는 나쁜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나은 남편이 된다는 것은 구원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교회를 가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행위를 깨끗케 하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나의 행위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 사역입니다.

“그래 너는 구원을 얻었어, 그러면 이제부터 교회에 꼭 나와야해 주일날도 나오고 수요일도 나오고 설교도 듣고 성경을 매일 읽고 기도도 매일하고 헌금도 해야 돼.” 모일 때 모이고 가르칠 때 가르치고 심방할 때 같이 심방하고 ... 너무 피곤합니다. 혹시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받기 전에는 예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고 난 후에는 네가 해야 돼, 네가 해야 돼 하고 가르칩니다. 전에는 너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야, 은혜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의 행위야 너의 행위야 하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너 스스로 해야 성장한다고 가칩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난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전도해 와라, 성경을 읽어라 안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성경을 너무나 읽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라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는 이미 기도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증거하라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복음을 전도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망쳐놓고 있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하고 싶은 일들을 우리가 너무 하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의 기쁨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로 빠집니다. 더 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를 가르치십시오.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을 가르치십시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어떻게 살고 싶어하시는지를 가르치십시오. 그 다음에 성경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바로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할 것입니다. 그것은 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여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요한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계명들은 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 영원토록 흘러나오는 상태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율법을 지키게 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한 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사랑이 저의 아내입니다.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합니다. 저는 2주 동안 나와 있는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해 주십시오. 아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와주십시오. 결혼생활의 법칙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주 만에 집에 들어가면 아내에게 제가 키스를 해야 할까요? 제가 꼭 해야 할까요? 해야 된다면 어떤 키스를 해야 합니까? 볼에다가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심각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저 분은 부부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면 아내에게 키스를 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 저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 안 해주어도 됩니다. 저의 부부생활은 규칙생활이 아닙니다. 이것은 관계입니다. 나는 내 심장이 열망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다면 교인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무한한 동기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에서 나오는 데로 행동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경건의 삶입니다.

2. 은혜와의 결혼

은혜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되 더 이상 다른 어떤 일을 위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되는 삶의 한 체계를 말합니다.

1)십자가에 의해서 우리의 율법과의 결혼은 끝이 났습니다.

은혜씨에게 결혼을 한다는 것은 율법씨와 함께 사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을 율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결혼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율법씨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생활은 죽을 때까지 갑니다. 문제는 율법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어떻게 해방됩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해서 영원부터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네가 나의 신부였으면 너무나 좋겠다.’‘나와 결혼을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율법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잘 해줄 텐데... 그런데 율법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네가 죽으면 되는 구나. 너를 죽게 한 다음에 다시 태어나게 해서.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서 나와 결혼을 하면 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언제 죽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은혜씨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율법씨와 결혼을 하였던 옛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4)

때때로 율법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와의 결혼생활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율법과의 결혼생활이 끝난 것입니다. 믿는 자는 율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1)믿는 자는 율법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율법과 결혼을 하였습니까? 율법과 결혼한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까? 율법과 결혼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은 지금도 건강하게 살았지만 여러분은 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더 이상 종교의 규칙 밑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의롭습니까?

2) 율법은 살아있고 훌륭하지만 이상 우리와 관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딤전1:9)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은 누구를 위해 온 것 입니까? 불의한 자를 위해 있습니까? 여러분 불의한 자입니까? 그러면 율법은 여러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우리는 은혜와의 결혼으로 연합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은혜와의 결혼에는 놀라운 기쁨이 넘쳐납니다. 은혜는 우리를 절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 왜 오늘 더 기도하지 않았니?’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만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니?’ 하고 화내지 않습니다.

2) 십자가에서 우리는 은혜와의 결혼으로 연합되었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결코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은혜는 우리와 함께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은혜는 의를 결혼의 반지처럼 줍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기독교인의 삶은 테스트 시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안식, 쉼입니다. 물론 시험은 우리에게 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100점을 맞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의 결혼은 우리에게 평생 동안 평안을 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28-29)

3)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혼은 삶의 휴식을 제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씨름은 끝났습니다. 그와 함께 안식하십시오. 안식하는 것조차도 의무가 아닙니다. 그저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꼭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율법씨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뇌가 율법과의 과거를 자꾸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은 새롭지만 죄는 과거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옛날 일을 생각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자꾸 혼동합니다.

3. 영적인 간음의 상처

“예수님 감사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 드릴까요?” “내 사랑을 그저 받아라.”

“감사합니다. 무엇을 해드릴까요?” “그냥 받기만 하라.”

사랑, 좋습니다. 주고 받습니다. “그러면 이제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데 나의 사랑을 받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충분히 섬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그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내 사랑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이미 나 중심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받는 만큼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더욱 주님을 사랑하도록 해 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만큼 사랑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사랑을 받을 때 사랑이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먼저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과의 관계가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점을 다른 데로 옮깁니다. 다른 데를 쳐다봅니다.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살아 있습니다. 그는 친구를 찾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찾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신분을 모르는 자는 시선을 그에게서 옮겨서 율법씨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세요. 물론입니다. 신분을 망각하는 자는 예수님의 신부임에도 율법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한 사람과 결혼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과 관계를 한다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간음입니다.

1) 영적인 간음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간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의 규칙을 위주로 그의 생활을 세워나갈 때 이루어집니다. 저도 교인들에게 종교의 규칙들을 요구했었습니다. 계속 이런 규칙들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설교합니다. 이런 설교는 목사님들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이런 은혜를 강조하다 보면 교인들이 방종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은혜의 이야기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를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교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죄를 많이 짖고 있는데. 그러나 은혜가 사람에게 절대로 죄를 짓게 하지는 않습니다.

2)영적인 간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 규칙들을 위주로 그의 생활을 세워나갈 때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딛2:11-12)

은혜가 사람들로 죄인의 삶을 격려하지는 않습니다. 은혜는 불경건한 것들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교인들에게 은혜를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종교적인 규칙들을 가르친다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인 기도를 말하면 이것이 율법이 됩니다. 결과는 기도를 싫어하게 됩니다. 성경 읽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말하십시오. 성경을 읽고 싶어 할 것입니다. 교인들을 해방시키십시오. 예수님이 주신 것은 해방입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담임목회를 할 때, 나는 이해가 되는데 교인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습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 어떤 사람들은 남용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성령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 가르침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몇 사람은 남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독교인은 남용하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오고 회개함으로 주님 앞으로 나올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자유와 해방을 가르칩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종교 규칙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4. 율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미국에서 미국의 문제의 유일한 답은 십계명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쓴 사람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썼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문제의 답은 십계명이 아닙니다. 미국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국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예수님이십니다. 규칙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율법을 주셨을까요?

1) 율법의 하나님의 거룩함의 외적인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의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으십니까? 율법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을 볼 수 있습니다.

2) 율법은 죄를 자극합니다. 율법이 죄를 자극한다면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저는 율법을 주신 이유가 죄를 짓지 말라고 주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5:20)

율법이 왔는데 이는 죄를 더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왜 증가시키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를 더 증가시켜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롬5:20절의 말입니다.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설명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죄를 증가시키는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3) 율법이 와서 죄를 승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콜라의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막고 흔든다면 콜라가 솟구쳐 나올 것입니다. 엄지손가락이 콜라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흔들었다고 콜라가 창조가 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단지 콜라를 흔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불의한자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영적으로 잘못되어서 도움이 필요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를 자극하여서 믿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답답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죄를 보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미 믿고 있는 자는 이런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믿는 자도 답답하고 절망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을 초청하여서 이런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간음했던 죄에 대하여 회개하십시오. 율법과 함께 했던 삶을 자백하십시오. 그리고 교인들에게 율법과 간음하였던 삶을 회개하게 하십시오. 그리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하십시오. 율법에서 떠나서 모든 사랑을 오직 주님께만 돌립니다. 이제부터는 종교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나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영원한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모든 사람의 자유를 위해 기도합니다. 율법주의에서 자유하고자 합니다. 정죄에서 자유하고자 합니다. 자기 비하의 정죄에서, 처참하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는 거짓말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는 압니다. 이제는 주님께 나갑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율법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잘가라. 잘가라!”

주님 우리는 주님의 품안에 안기길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영원토록. 자유를 선포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선포를 원합니다. 능력으로 선포하게 하소서. 아멘.

<당신은 율법으로 삽니까? 아니면 은혜로 삽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말합니다.                                           은혜는 말합니다.

당신은 해야만 한다.                                       반드시 꼭 나는 원한다.
율법을 잊지 말라.                                          나는 나의 관계성 속에서 쉬고 있다.
그것은 당신의 의무이다.                                 그것은 나의 바램이다.
당신은 당신의 행위를 개선시켜야 한다.             나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증진시키기를 원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의무가 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길 특권을 가지고 있다.
원리를 중심으로 당신의 삶을 세우라.                나의 생명은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당신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공급 속에서 쉼을 선택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바쳐야 한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포기할 것이다.
당신의 확신들에 의해서 살아라.                       나는 주님의 내주하심에 의해서 산다.
당신은 경건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나는 거룩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본래 모습 그대로 행동할 것이다.
당신은 죄에 대해서 싸울 필요가 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승리를 위해 싸워라.                                       예수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에 나는 승리한다.
열매를 생산하라.                                           나는 단순히 예수 안에 거함으로 열매들을 생산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권리를 갖고 있다.                      나는 나의 권리들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힘은 나의 연약함 속에서 보인다.
예수님을 위해 어떤 것을 하라.                         나는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살도록 할 것이다.
당신은 더 나은 자기 이미지가 필요하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군지 안다.
당신은 단지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은 죄인이다.   나는 예수님의 본성을 나누어 가진 성도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실망했다.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시고 전적으로 나를 받아 들이셨다.


(질문과 답변)

질문: 골3:3에서는 우리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5절에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을 쳐서 복종해야 하지 않습니까?

답변: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매일 사는 것은 이미 죽은 사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어에 보면 여러분의 지체가 죽은 것처럼 여겨라 하고 말합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영어성경과 와 한국성경이 많이 다릅니다. 생명체는 몇 번 죽습니까? 죽었을 때는 죽은 것입니다. 한번 죽고 난 다음에 안 죽었으면 좋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5절의 죽이라고 한 것은 죽은 것을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수표가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죽음입니다. 이 현찰을 쓰십시오. 이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을 죽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은 매일 확인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미국에 가면 개인이 쓰는 수표(Check)가 있습니다. 현찰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체크를 이용하여 사용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체크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체크를 현찰로 받아서 매일 쓰는 것, 받아서 죽었지만 매일 매일 쓰는 것은 바로 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한번 죽고 나서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은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즉 죽은 상태로 계속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질문2: 고전3:1에서 분열이 있는 교회를 어린아이와 같이 대함과 같이 하노라하고 너희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변: 육과 옛사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옛 자아는 죽었습니다. 육은 옛날 것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나의 신분을 옛날식으로 쓸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 받은 영의 신분은 육을 조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질문 3: 근본적으로는 의인이지만 발을 씻는 작업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용납을 기초로 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질문4: 인간의 본질에서 영과 혼 지정의의 정의와 상호작용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답변: 저는 3분설을 믿습니다. 어떤 이는 2분설을 믿습니다. 2분설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눕니다. 혼은 지정의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개성입니다. 영은 나를 밝혀주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입니다. 우리에게는 혼도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 있습니다. 어떤 이는 혼과 영을 같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분설과 삼분설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살전5:23절에서 3가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음을 말 할뿐입니다.

우리의 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거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혼으로 흘러 들어가서 몸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물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혼은 차와 같습니다. 녹차 홍차 인삼차 등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개성들이 있습니다. 영과 혼의관계는 물이 있는데 여러 가지 차로 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차는 물이 있어야 만이 차가 됩니다. 티백을 빨아먹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저는 한가지의 개성, 한가지의 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맛의 혼이 있습니다. 그러나 혼은 육과도 반대가 되고 영과도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혼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것이 영으로 나타나지 아니할 때에 우리의 육이 나타나게 됩니다.

지각과 마음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뇌와 마음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시체는 뇌가 있지만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가다가 원치 않는 것도 뇌 속으로 받아들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도 뇌는 컴퓨터처럼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것을 걸러서 행동하게 합니다.

질문: 눅9: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은 우리가 너무나 무거운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지라는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짐은 가볍고 멍에는 쉽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지만 그가 같이 집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미 죽은 우리의 자아,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아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라고 해서 고난만 당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현실에서 진다는 것은 이미 죽은 십자가의 사건을 현실에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둘이서 함께 연합하여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그 죽었던 삶을 연장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믿기를 예수그리스도가 이제는 부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질문: 살전5:16-이하의 말씀은 온전한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죽어가는 자아를 보면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답변: 우리가 예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지만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과 행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너무나 고통스런 나머지 땀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행복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내 기쁨이 충만하게 하소서. 우리의 기쁨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 안에서 행복하지 않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갇혀있던 바울이 상황은 안 좋았지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기뻐하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감옥에 있는 것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5년 전에 제 아들이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떨어졌는데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등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머리에서는 5군데서 피가 났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의사는 이 아이는 살지 못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산다 할지라도 걷지 못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뇌가 거의 망가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갔을 때에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응급차로 다른 병원으로 옮길 때 차 안에는 나와 아내가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에 우리는 울었습니다. 병원에 거의 도착할 때 쯤 내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한 가지 동의해 주시오. 오늘사건이 어떤 결과로 나올지 모르지만 하나니은 변함이 없으시며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 안에서는 슬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식하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도 다른 사람은 우는 데 기뻐한 척 합니다. 천국에 갔으니 나는 기뻐요. 잘됐네요. 주님 앞에 갔으니까! 이야기하는 내용은 맞지만 그가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상황 속에서 불행을 느끼는 것은 괜찮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꼭 울어야 돼’하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녀는 많이 울 것입니다.

질문: 교회의 리더 가운데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는데 계속 리더로 세워야 합니까? 본인도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답변: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무슨 일인가를 분명히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한국교회 전체 안에 있는 리더들이 한 가지 잘못하는 일 때문에 리더를 그만두게 된다면 몇 명의 리더가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가 없는 자가 돌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일어나 보십시오. 때때로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은혜를 죄를 가볍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은혜는 사람들을 대하기 쉽게 만듭니다. 나는 나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육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돌을 안 던질 것입니다. 지금 죄를 짓고서 나는 절대로 잘못한 것이 없어, 회개할 것이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담대하며 계속 그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 교만한 자세가 있는 사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완전히 다른 경우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거부하고 거역하는 영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리더쉽에서 그 사람을 제외하는 것이 더 났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교회에서 리더 중에서 죄가 없는 사람을 살펴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목사를 하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리더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정죄하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십시오. 그리고나서 나를 바라보고 그를 바라보십시오.

질문: 완전한 은혜와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이후 율법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변: 율법과 우리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인데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율법과 관계가 있던 그 사람은 이제 완전히 죽었습니다. 율법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율법과 관계를 갖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질문: 목사님의 신학적 노선은 엠.알.디한의 세대주의와 같은 입장인가?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 3 용도는 기도하고 싶다고 했는데 물론이다. 그러나 기도에 힘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칼빈의 제 3 용도는 사회를 관할하는 한 용도로서 이 말이 맞습니까?

답변: 제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과속을 안 하고 절대로 어지러운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휴지도 안 버립니다. 은행도 털지 않습니다. 싸움도 안합니다. 돈도 훔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모든 율법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것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저의 할아버지인데 그분은 법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율법을 지킨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율법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도적질은 안하고 간음을 안 한다면 내가 탐욕을 안 품는다면 나는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내 삶을 성경에 의하여 평가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을 따르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의 의와 반대되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면 죽은 것이지 다시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율법반대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주의자가 아닙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딤전 1:9)

저의 신학은 개혁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의 신학의 위치를 말씀드립니다. 개혁주의자가 설교를 할 때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얻는 것에 대하여서는 잘 설교를 하고 성화에 와서는 흐트러지는 것을 봅니다.

질문: 예수님은 율법은 완성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답변: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만이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분입니다. 율법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는 분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율법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완성하셨고 그리고 그가 내 안에 계십니다. 내가 율법과 빚졌던 모든 것들이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을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다 라고 합니다.

롬10: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마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끝났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