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온 솔로 기회
2005.10.02 23:39
2005년 10월 1일
오후 3시 30분
아내의 가방에 들어있던 내 핸드폰이 울린다.
"솔 도 시라 도 솔 미 솔 도 레미파 미레~ "
비록 단선율이지만 핸드폰 벨소리로 애국가 멜로디를 입력해 놓았기에, 핸드폰이 울리면 애국가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기도 하다.
전화는 극장 사무국장인 Herr Herzog 에게서 온 것이었다.
참고로 사무국장은 극장장 다음으로 실권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공연에 대한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중요한 사람이다.
'아니, 이 사람이 왠 일이지?'
평소 사무국장과는 자주 마주칠 일도 없으며, 특히 개인적으로 더 볼 일이 없는 터라, 내게 왜 전화했을까 궁금했다.
"석선생님(Herr Seok), 저는 사무국장 Herzog 입니다. 제가 석선생님께 전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극장에 비상사태(Notfall)가 발생했습니다. 베이스 Kovács 가 내일 무대에 올라가는 '라 조콘다' 연주를 못하게 됐다는 연락을 방금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이스 Kovács 가 한 역을 석선생님이 해 주셨으면 하고 연락 드리는 것입니다."
아마 베이스 Kovács 가 갑자가 몸이 아파져서 연주를 못하게 되었는데, 이미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에, 내일 저녁에 무대에 올라가는 '라 조콘다' 에 그 역을 할 사람을 다른 곳에서 데려 올 형편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합창단원으로 리허설(General Probe) 때 얼핏 들어본 바에 의하면, 베이스 Kovács 가 하는 역은 분량이 그리 많지 않는 조역이지만 음정이 까다로운 걸로 기억이 났다.
나는 사무국장 Herr Herzog 에게 내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도와주겠지만, 일단 악보를 보고 확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내가 그 역을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다며, 악보를 보고 난 후에 답을 들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렇다면 일단 내가 그 역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Herr Herzog 은 고맙다며, 그렇다면 극장에 다른 관계자들에게 연락한 뒤 약 20분 후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참고로 내일 무대에 올라가는 '라 조콘다'는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하는 오페라(Konzertante)로 연주자들이 연주복을 입고 서서 연주하기 때문에 일명 '스텐딩 오페라(Standing Opera)' 라고도 한다.
이러한 콘서트 형식의 오페라는 각 솔리스트들이 자기 앞에 있는 보면대에 악보를 펴서 보고 하기 때문에 악보를 안 외워도 할 수 있다.
약 20분 후에는 집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는 예상했던 것처럼 Herr Herzog 에게서 왔다.
그는 총지휘자(General Musik Direktor) Herr Fritsch와 내일 '라 조콘다'를 지휘할 수석지휘자(Erster Kapellmeister) Herr Willig 에게 연락해서 동의를 받았다며, 극장 반주자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오늘 오후 7시 30분에 공연하는 '마술피리(마적, Zauberflöte) 연주는 하지 말고 '라 조콘다'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오후 4시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역시 Herr Herzog 이었다.
그는 내게 오후 5시에 극장에서 반주자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내일 연주하기 전 오후 4시 45분에 수석지휘자인 Herr Willig 와 연습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짜두었다고 했다.
내가 악보는 어디서 받을 수 있냐고 물으니, 반주자가 내 악보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려울 때 극장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어려울 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매우 기쁘며,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평소 '구해주다'라는 단어를 들으면 예수님이 생각나는데, 오늘 그 단어가 내게 적용되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과연 내가 그 역을 하겠다고는 했는데, 내가 맡은 역을 잘못해서 극장을 구하기는 커녕, 확실하게 연주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부담감이 확 밀려왔다.
오후 4시 55분
극장에 도착한 나는 반주자를 만났다.
나는 반주자에게 내가 볼 악보를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자기가 볼 악보 하나 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악보도 없이 무슨 연습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반주자는 내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연습실을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복사된 악보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일단 복사된 악보로 연습을 한 후, 내일 책으로 인쇄된 악보를 받으라고 하였다.
나는 악보에 내가 노래 부를 부분을 표시하고, 악상과 곡해석 등 여러 가지를 적어야 실수를 최대한 줄여서 연주 할 수 있으니, 내일 악보를 받게 되면 그 악보에 다시 기입하는 것도 힘들거니와, 새로 기입한 악보가 눈에 잘 안 들어와서 힘들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없는 악보를 어떻게 만들 수도 없는 일.
일단 복사된 악보를 보며 연습을 시작했다.
내가 부를 역은 Zuane, un cantore, 그리고 un'altra voce 이렇게 자그마한 세가지 역이다.
세가지 역의 총 분량은 악보 20페이지 정도 되었다.
반주자와 함께 열심히 악보를 읽으며 여러 번 반복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약간 느린 템포로 가사와 음정을 읽으면서 연습을 했으며, 반복을 몇 번 거듭한 후에는 실제 연주할 템포로 연습을 했다.
음악적인 악상과 곡해석에 맞춰서 잘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 연습이 끝났다.
연습이 끝나자 반주자는 Herr Herzog 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그 역을 잘 해낼 거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Herzog 에게 악보가 없어서 복사본으로 내일 연주하겠다고 하자, 그는 내 악보가 있어야 된다고 하며, 사무실에 연락해서 내가 볼 악보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마침 극장 도서실 담당자가 극장으로 오는 중이라는 연락이 와서 나는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수위아저씨에게 내가 가져갈 악보가 오면 극장 매점(Kantine)으로 연락해 달라고 했다.
보통 극장에서는 연주할 작품에 필요한 악보를 출판사로부터 대여해 온다.
지휘자가 보는 악보에서부터 솔리스트, 합창단, 오케스트라 악보까지 다 빌려온 후, 그 작품의 연주가 끝난 후에 다시 수거해서 출판사에 반납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면 적게는 4-5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에 걸쳐서 십몇 회에서 수십 회 연주를 한다.
오후 6시 30분
극장 매점에서 오랜만에 콜라 한 잔을 마시며 갈증을 달래고 있는데 내 악보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수위실에 있는 악보를 받고는 수위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집으로 가려고 극장문을 나서는데 극장 출입문에 공고문이 보였다.
내용을 보니 베이스 Kovács 가 내일 '라 조콘다' 연주를 못하게 되어서 내가 그 역을 맡아서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공고문을 보니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오후 7시
집에 도착한 나는 극장에서 연습 녹음한 것을 들으며 받아온 악보에 내게 필요한 내용을 연필로 적었다.
극장에서 빌려온 악보는 나중에 다시 반납해야 하며, 또 그 악보는 언젠가 다른 사람이 또 빌려서 보게 된다.
그러므로 형광펜이나 볼펜으로는 못 적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입장하는 부분, 노래 시작하는 부분들에는 클립을 꽂아서 쉽게 빨리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오후 8시
아내가 저녁 식사하라고 한다.
나는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악보를 보며 공부했다.
오후 8시 30분
예전에 이탈리아서 샀던 음악시디 중에서 '라 조콘다' 시디를 발견해서 들었다.
전체적인 곡의 흐름도 느낄 수 있으며, 제일 중요한 오케스트라 반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극장에서 반주자와 연습할 때에는 피아노 반주로 연습했지만, 막상 내일 저녁에는 오케스트라 반주로 연주를 하게 되는데, 내가 노래 부르는 부분에는 어떠한 악기가 반주하는지 들어 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노래하는 부분은 '라 조콘다' 시디 중에서 4개의 트랙에 나뉘어져 있었다.
나는 악보를 보며 그 4개의 트랙을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다.
오후 11시 30분
계속 반복해서 악보를 보며 음악시디와 연습 녹음한 것을 들으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던 중 극장 동료 세르게이게로부터 메신저 멧새지가 왔다.
그는 내가 내일 '라 조콘다'에서 솔로로 연주하게 되어서 축하한다가 하였다.
나는 오후 5시부터 계속해서 악보를 보고 그 부분의 음악을 듣고 있어서 이제 머리도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럴 때에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한판 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좋을 거라고 했다.
한국의 국민게임이라는 스타크래프트의 위용을 세르게이에게 소개한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어가나 보다.
나는 물론 세르게이도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며, 게다가 가끔 한번씩 게임하기에 다른 사람들과 게임할 실력은 안 되어 우리는 주로 우리 두 명이 같은 편이 되어서 컴퓨터를 대항해서 게임을 한다.
나는 세르게이에게 그럼 한 판 멋지게 해보자고 하였다.
우리 두 명이 같은 편이 되어서 컴퓨터 4명으로 셋팅한 게임을 하여서 게임을 시작했다.
물론 게임을 하는 순간에도 내가 연습한 녹음을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무의식 중에 그 음악을 익히고자 하였다.
힘겹게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
왠지 내일 연주도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며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2005년 10월 2일
오전 7시 15분
잠을 더 청하고 싶었으나, 긴장이 되어서인지 자꾸 잠이 깨어서 더 자는 것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성악가에게 잠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일반적으로 8시간 이상을 잘 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오전 7시 30분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했다.
창 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나는 악보와 성경책을 들고 다락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다.
올 해 성경일독을 목표로 성경말씀을 일정표에 따라 읽고 있는데, 내가 게을러서 매일 성경말씀을 분량만큼 읽지 못하고, 때에 따라서는 1주일씩, 2주일씩 안 읽을 때도 있다.
보통은 내가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한다거나 어떠한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는 될 수 있는 한 밀린 부분을 다 읽어서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열심을 내어본다.
오늘 오후에 있는 연주를 위해서 악보 읽을 시간도 부족한 시점이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히 여기며 성경말씀을 읽었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읽은 후에 노래를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왠지 더 강하게 지켜주실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전 9시
밀린 성경말씀을 다 읽었다.
10월 2일 분량까지 다 읽고 나니 무거운 짐을 하나 덜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내가 아침식사를 하라고 해서 내려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오전 9시 10분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와서 이번에는 전자피아노 앞에 앉아서 악보를 읽었다.
볼륨 조절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연습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 전자피아노 소리는 방해가 되지 않았지만, 내 목소리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전 10시
어제 연습 녹음한 것을 다시 들어보았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연습하고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더 이상 어제 새로이 연습한 곡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전 10시 40분
집을 출발해서 교회로 향했다.
샤론이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안개를 보며, "밖이 왜 하얗지?"라고 물었다.
나는 저 하늘의 떠 있는 구름이 땅에 가까이 있으면 저렇게 하얀 안개가 된다고 이야기 해 줬다.
오전 11시
독일 교회 행사가 있는 관계로 본당에서 성가대 연습을 했다.
오전 11시 30분
오민수 강도사님의 인도로 경배와 찬양의 시간을 가졌다.
오전 11시 45분
주일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이부순서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오늘 저녁에 있는 연주를 위하여 마늘이 들어있는 반찬은 피하고 먹었다.
아무래도 마늘이 있는 반찬을 먹으면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피해가 되기에 가급적이면 피한다.
오후 2시 30분
10월 마지막 주일에 있는 킬 한인선교교회 창립 15주년 기념 성가를 위한 성가연습이 있었다.
오후 3시 30분
한 달에 한번씩 킬에 오시는 한인식품 아저씨의 봉고차가 있는 킬 대학 근처에서 필요한 먹거리를 구입했다.
오후 4시
집에 도착한 나는 잠시나마 잠을 청하였으나, 쫓기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아내에게 커피 한 잔 부탁을 하고는 다시 한번 악보를 보며 연습 녹음을 들었다.
오후 4시 25분
집을 출발해서 극장으로 향했다.
오후 4시 45분
수석지휘자인 Herr Willig 를 만나서 연습을 했다.
그는 내가 갑작스럽게 역을 맡아줘서 너무 고맙고 한편으로는 내가 이 역을 부르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나도 내게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대답하며 나 역시 매우 기쁘다고 했다.
오후 5시 15분
사무국장인 Herr Herzog 이 와서 내가 이 역을 하게 되어서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며 인사를 한다.
오후 5시 30분
합창동료들이 와서 "Toi, toi, toi" 를 외친다.
한국말로 하자면 연주를 앞둔 사람에게 "잘하세요"라고 격려하는 말 정도가 아닐까.
이 때는 대답으로도 역시 "Toi, toi, toi"라고 말한다고 한다.
오후 6시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번 연주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란다고 기도 드렸다.
오후 6시 15분
방송에서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이제 내가 무대에 나갈 때가 된 것이다.
합창단은 벌써 무대에 올라가 있었다.
무대 옆에 있는 합창지휘자를 만났다.
그는 내게 "Toi, toi, toi"를 외친 후, 다른 합창단원들을 가리키며 나보고 너무 늦게 왔다고 농담하며 웃었다.
잠시 후 무대에 올라가서 내가 맡은 부분인 Zaune 역을 노래했다.
그 순간에도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며 감사 드렸다.
오후 8시 30분
내 이름이 다시 호명되었다.
이번에는 un cantore 역이었다.
나는 나의 입장이 예정된 곳으로 가서 내가 무대에 올라갈 순간을 기다린다.
갑자기 무대 반대편에 있던 조연출이 내게 손짓을 하더니무대 뒤를 돌아서 뛰어왔다.
내 입장 위치가 배포된 종이에 적힌 곳에서 바뀌었다고 하며 나를 반대쪽으로 데리고 간다.
다행히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어서 숨을 고르고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할 수 있었다.
오후 8시 45분
이번에는 무대 뒤에서 노래 부르는 부분으로 un'altra voce 역이다.
다른 테너 솔로가 부르는 두 마디의 노래를 듣고 불러야 하는 부분으로 두 마디 분량의 짧은 부분이다.
리허설 때까지 부른 테너와 베이스의 음정이 많이 쳐져서 무대에서 연주되는 반주를 잘 들을 수 있도록 헤드폰을 쓰고 부르도록 조치했다고 했다.
무대 뒤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그냥 무대에서 부르는 것에 비해서 음정 잡기가 쉽지 않다.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음정대로 부르면 확실하게 쳐지는 음을 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테너는 한번도 헤드폰 쓰고 연습해 본 적이 없어서 안 쓰고 할 것이라고 했으며, 나 또한 헤드폰 쓰고 노래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져서 안 쓰고 그냥 하기로 했다.
이윽고 그 테너가 노래를 부르는데, 역시 음정이 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자신있게 그 테너보다 약간 높게 불렀다.
나는 노래를 부른 후 손을 치켜 들었으며,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많은 동료들이 소리나지 않게 환호하며 격려해줬다.
오후 9시 00분
연주가 끝났다.
다같이 인사를 하기 위하여 무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개별 인사를 하기 위하여 무대에 올라가자 뒤에서 "쿵쿵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 서있던 합창단원 동료들이 무대에서 발을 굴리며 나를 위하여 축하해 주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활과 손으로 보면대를 '톡톡톡톡' 치며 축하해 줬다.
관객들도 큰 박수로 축하해줬다.
모두들 활짝 웃는 얼굴로 관객들의 박수에 인사했다.
지휘자와 솔리스트 모두에게 꽃다발이 하나씩 주어졌다.
그 꽃다발을 보자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 아내생각이 났다.
많은 동료들도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 보이거나 나를 안고는 등을 두드리며 축하해줬다.
오후 9시 30분
연주가 끝난 후 극장 2층 라운지에서 리셉션이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꼭 참석하라는 극장 평론가와 사무국장 등과 함께 리셉션장으로 갔다.
극장 평론가는 한사람씩 한사람씩 소개하면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는 내가 어제 오후에 갑자기 이 역할을 맡아서 오늘 성공적으로 연주해줘서 고맙다며 소개했으며, 많은 관객들이 큰 박수로 축하해 줬다.
오후 10시
집에 돌아와서 연주 잘했냐는 아내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며 꼭 안아줬다.
***
지금 들으시는 음악은 'Ponchielli'의 오페라 'La Gioconda' 중에 나오는 'Danza delle ore' 라는 곡입니다
오후 3시 30분
아내의 가방에 들어있던 내 핸드폰이 울린다.
"솔 도 시라 도 솔 미 솔 도 레미파 미레~ "
비록 단선율이지만 핸드폰 벨소리로 애국가 멜로디를 입력해 놓았기에, 핸드폰이 울리면 애국가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기도 하다.
전화는 극장 사무국장인 Herr Herzog 에게서 온 것이었다.
참고로 사무국장은 극장장 다음으로 실권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공연에 대한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중요한 사람이다.
'아니, 이 사람이 왠 일이지?'
평소 사무국장과는 자주 마주칠 일도 없으며, 특히 개인적으로 더 볼 일이 없는 터라, 내게 왜 전화했을까 궁금했다.
"석선생님(Herr Seok), 저는 사무국장 Herzog 입니다. 제가 석선생님께 전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극장에 비상사태(Notfall)가 발생했습니다. 베이스 Kovács 가 내일 무대에 올라가는 '라 조콘다' 연주를 못하게 됐다는 연락을 방금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이스 Kovács 가 한 역을 석선생님이 해 주셨으면 하고 연락 드리는 것입니다."
아마 베이스 Kovács 가 갑자가 몸이 아파져서 연주를 못하게 되었는데, 이미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에, 내일 저녁에 무대에 올라가는 '라 조콘다' 에 그 역을 할 사람을 다른 곳에서 데려 올 형편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합창단원으로 리허설(General Probe) 때 얼핏 들어본 바에 의하면, 베이스 Kovács 가 하는 역은 분량이 그리 많지 않는 조역이지만 음정이 까다로운 걸로 기억이 났다.
나는 사무국장 Herr Herzog 에게 내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도와주겠지만, 일단 악보를 보고 확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내가 그 역을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다며, 악보를 보고 난 후에 답을 들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렇다면 일단 내가 그 역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Herr Herzog 은 고맙다며, 그렇다면 극장에 다른 관계자들에게 연락한 뒤 약 20분 후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참고로 내일 무대에 올라가는 '라 조콘다'는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하는 오페라(Konzertante)로 연주자들이 연주복을 입고 서서 연주하기 때문에 일명 '스텐딩 오페라(Standing Opera)' 라고도 한다.
이러한 콘서트 형식의 오페라는 각 솔리스트들이 자기 앞에 있는 보면대에 악보를 펴서 보고 하기 때문에 악보를 안 외워도 할 수 있다.
약 20분 후에는 집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는 예상했던 것처럼 Herr Herzog 에게서 왔다.
그는 총지휘자(General Musik Direktor) Herr Fritsch와 내일 '라 조콘다'를 지휘할 수석지휘자(Erster Kapellmeister) Herr Willig 에게 연락해서 동의를 받았다며, 극장 반주자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오늘 오후 7시 30분에 공연하는 '마술피리(마적, Zauberflöte) 연주는 하지 말고 '라 조콘다'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오후 4시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역시 Herr Herzog 이었다.
그는 내게 오후 5시에 극장에서 반주자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내일 연주하기 전 오후 4시 45분에 수석지휘자인 Herr Willig 와 연습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짜두었다고 했다.
내가 악보는 어디서 받을 수 있냐고 물으니, 반주자가 내 악보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려울 때 극장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어려울 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매우 기쁘며,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평소 '구해주다'라는 단어를 들으면 예수님이 생각나는데, 오늘 그 단어가 내게 적용되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과연 내가 그 역을 하겠다고는 했는데, 내가 맡은 역을 잘못해서 극장을 구하기는 커녕, 확실하게 연주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부담감이 확 밀려왔다.
오후 4시 55분
극장에 도착한 나는 반주자를 만났다.
나는 반주자에게 내가 볼 악보를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자기가 볼 악보 하나 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악보도 없이 무슨 연습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반주자는 내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연습실을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복사된 악보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일단 복사된 악보로 연습을 한 후, 내일 책으로 인쇄된 악보를 받으라고 하였다.
나는 악보에 내가 노래 부를 부분을 표시하고, 악상과 곡해석 등 여러 가지를 적어야 실수를 최대한 줄여서 연주 할 수 있으니, 내일 악보를 받게 되면 그 악보에 다시 기입하는 것도 힘들거니와, 새로 기입한 악보가 눈에 잘 안 들어와서 힘들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없는 악보를 어떻게 만들 수도 없는 일.
일단 복사된 악보를 보며 연습을 시작했다.
내가 부를 역은 Zuane, un cantore, 그리고 un'altra voce 이렇게 자그마한 세가지 역이다.
세가지 역의 총 분량은 악보 20페이지 정도 되었다.
반주자와 함께 열심히 악보를 읽으며 여러 번 반복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약간 느린 템포로 가사와 음정을 읽으면서 연습을 했으며, 반복을 몇 번 거듭한 후에는 실제 연주할 템포로 연습을 했다.
음악적인 악상과 곡해석에 맞춰서 잘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 연습이 끝났다.
연습이 끝나자 반주자는 Herr Herzog 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그 역을 잘 해낼 거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Herzog 에게 악보가 없어서 복사본으로 내일 연주하겠다고 하자, 그는 내 악보가 있어야 된다고 하며, 사무실에 연락해서 내가 볼 악보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마침 극장 도서실 담당자가 극장으로 오는 중이라는 연락이 와서 나는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수위아저씨에게 내가 가져갈 악보가 오면 극장 매점(Kantine)으로 연락해 달라고 했다.
보통 극장에서는 연주할 작품에 필요한 악보를 출판사로부터 대여해 온다.
지휘자가 보는 악보에서부터 솔리스트, 합창단, 오케스트라 악보까지 다 빌려온 후, 그 작품의 연주가 끝난 후에 다시 수거해서 출판사에 반납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면 적게는 4-5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에 걸쳐서 십몇 회에서 수십 회 연주를 한다.
오후 6시 30분
극장 매점에서 오랜만에 콜라 한 잔을 마시며 갈증을 달래고 있는데 내 악보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수위실에 있는 악보를 받고는 수위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집으로 가려고 극장문을 나서는데 극장 출입문에 공고문이 보였다.
내용을 보니 베이스 Kovács 가 내일 '라 조콘다' 연주를 못하게 되어서 내가 그 역을 맡아서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공고문을 보니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오후 7시
집에 도착한 나는 극장에서 연습 녹음한 것을 들으며 받아온 악보에 내게 필요한 내용을 연필로 적었다.
극장에서 빌려온 악보는 나중에 다시 반납해야 하며, 또 그 악보는 언젠가 다른 사람이 또 빌려서 보게 된다.
그러므로 형광펜이나 볼펜으로는 못 적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입장하는 부분, 노래 시작하는 부분들에는 클립을 꽂아서 쉽게 빨리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오후 8시
아내가 저녁 식사하라고 한다.
나는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악보를 보며 공부했다.
오후 8시 30분
예전에 이탈리아서 샀던 음악시디 중에서 '라 조콘다' 시디를 발견해서 들었다.
전체적인 곡의 흐름도 느낄 수 있으며, 제일 중요한 오케스트라 반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극장에서 반주자와 연습할 때에는 피아노 반주로 연습했지만, 막상 내일 저녁에는 오케스트라 반주로 연주를 하게 되는데, 내가 노래 부르는 부분에는 어떠한 악기가 반주하는지 들어 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노래하는 부분은 '라 조콘다' 시디 중에서 4개의 트랙에 나뉘어져 있었다.
나는 악보를 보며 그 4개의 트랙을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다.
오후 11시 30분
계속 반복해서 악보를 보며 음악시디와 연습 녹음한 것을 들으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던 중 극장 동료 세르게이게로부터 메신저 멧새지가 왔다.
그는 내가 내일 '라 조콘다'에서 솔로로 연주하게 되어서 축하한다가 하였다.
나는 오후 5시부터 계속해서 악보를 보고 그 부분의 음악을 듣고 있어서 이제 머리도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럴 때에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한판 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좋을 거라고 했다.
한국의 국민게임이라는 스타크래프트의 위용을 세르게이에게 소개한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어가나 보다.
나는 물론 세르게이도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며, 게다가 가끔 한번씩 게임하기에 다른 사람들과 게임할 실력은 안 되어 우리는 주로 우리 두 명이 같은 편이 되어서 컴퓨터를 대항해서 게임을 한다.
나는 세르게이에게 그럼 한 판 멋지게 해보자고 하였다.
우리 두 명이 같은 편이 되어서 컴퓨터 4명으로 셋팅한 게임을 하여서 게임을 시작했다.
물론 게임을 하는 순간에도 내가 연습한 녹음을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무의식 중에 그 음악을 익히고자 하였다.
힘겹게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
왠지 내일 연주도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며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2005년 10월 2일
오전 7시 15분
잠을 더 청하고 싶었으나, 긴장이 되어서인지 자꾸 잠이 깨어서 더 자는 것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성악가에게 잠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일반적으로 8시간 이상을 잘 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오전 7시 30분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했다.
창 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나는 악보와 성경책을 들고 다락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다.
올 해 성경일독을 목표로 성경말씀을 일정표에 따라 읽고 있는데, 내가 게을러서 매일 성경말씀을 분량만큼 읽지 못하고, 때에 따라서는 1주일씩, 2주일씩 안 읽을 때도 있다.
보통은 내가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한다거나 어떠한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는 될 수 있는 한 밀린 부분을 다 읽어서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열심을 내어본다.
오늘 오후에 있는 연주를 위해서 악보 읽을 시간도 부족한 시점이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히 여기며 성경말씀을 읽었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읽은 후에 노래를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왠지 더 강하게 지켜주실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전 9시
밀린 성경말씀을 다 읽었다.
10월 2일 분량까지 다 읽고 나니 무거운 짐을 하나 덜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내가 아침식사를 하라고 해서 내려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오전 9시 10분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와서 이번에는 전자피아노 앞에 앉아서 악보를 읽었다.
볼륨 조절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연습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 전자피아노 소리는 방해가 되지 않았지만, 내 목소리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전 10시
어제 연습 녹음한 것을 다시 들어보았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연습하고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더 이상 어제 새로이 연습한 곡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전 10시 40분
집을 출발해서 교회로 향했다.
샤론이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안개를 보며, "밖이 왜 하얗지?"라고 물었다.
나는 저 하늘의 떠 있는 구름이 땅에 가까이 있으면 저렇게 하얀 안개가 된다고 이야기 해 줬다.
오전 11시
독일 교회 행사가 있는 관계로 본당에서 성가대 연습을 했다.
오전 11시 30분
오민수 강도사님의 인도로 경배와 찬양의 시간을 가졌다.
오전 11시 45분
주일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이부순서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오늘 저녁에 있는 연주를 위하여 마늘이 들어있는 반찬은 피하고 먹었다.
아무래도 마늘이 있는 반찬을 먹으면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피해가 되기에 가급적이면 피한다.
오후 2시 30분
10월 마지막 주일에 있는 킬 한인선교교회 창립 15주년 기념 성가를 위한 성가연습이 있었다.
오후 3시 30분
한 달에 한번씩 킬에 오시는 한인식품 아저씨의 봉고차가 있는 킬 대학 근처에서 필요한 먹거리를 구입했다.
오후 4시
집에 도착한 나는 잠시나마 잠을 청하였으나, 쫓기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아내에게 커피 한 잔 부탁을 하고는 다시 한번 악보를 보며 연습 녹음을 들었다.
오후 4시 25분
집을 출발해서 극장으로 향했다.
오후 4시 45분
수석지휘자인 Herr Willig 를 만나서 연습을 했다.
그는 내가 갑작스럽게 역을 맡아줘서 너무 고맙고 한편으로는 내가 이 역을 부르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나도 내게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대답하며 나 역시 매우 기쁘다고 했다.
오후 5시 15분
사무국장인 Herr Herzog 이 와서 내가 이 역을 하게 되어서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며 인사를 한다.
오후 5시 30분
합창동료들이 와서 "Toi, toi, toi" 를 외친다.
한국말로 하자면 연주를 앞둔 사람에게 "잘하세요"라고 격려하는 말 정도가 아닐까.
이 때는 대답으로도 역시 "Toi, toi, toi"라고 말한다고 한다.
오후 6시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번 연주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란다고 기도 드렸다.
오후 6시 15분
방송에서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이제 내가 무대에 나갈 때가 된 것이다.
합창단은 벌써 무대에 올라가 있었다.
무대 옆에 있는 합창지휘자를 만났다.
그는 내게 "Toi, toi, toi"를 외친 후, 다른 합창단원들을 가리키며 나보고 너무 늦게 왔다고 농담하며 웃었다.
잠시 후 무대에 올라가서 내가 맡은 부분인 Zaune 역을 노래했다.
그 순간에도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며 감사 드렸다.
오후 8시 30분
내 이름이 다시 호명되었다.
이번에는 un cantore 역이었다.
나는 나의 입장이 예정된 곳으로 가서 내가 무대에 올라갈 순간을 기다린다.
갑자기 무대 반대편에 있던 조연출이 내게 손짓을 하더니무대 뒤를 돌아서 뛰어왔다.
내 입장 위치가 배포된 종이에 적힌 곳에서 바뀌었다고 하며 나를 반대쪽으로 데리고 간다.
다행히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어서 숨을 고르고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할 수 있었다.
오후 8시 45분
이번에는 무대 뒤에서 노래 부르는 부분으로 un'altra voce 역이다.
다른 테너 솔로가 부르는 두 마디의 노래를 듣고 불러야 하는 부분으로 두 마디 분량의 짧은 부분이다.
리허설 때까지 부른 테너와 베이스의 음정이 많이 쳐져서 무대에서 연주되는 반주를 잘 들을 수 있도록 헤드폰을 쓰고 부르도록 조치했다고 했다.
무대 뒤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그냥 무대에서 부르는 것에 비해서 음정 잡기가 쉽지 않다.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음정대로 부르면 확실하게 쳐지는 음을 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테너는 한번도 헤드폰 쓰고 연습해 본 적이 없어서 안 쓰고 할 것이라고 했으며, 나 또한 헤드폰 쓰고 노래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져서 안 쓰고 그냥 하기로 했다.
이윽고 그 테너가 노래를 부르는데, 역시 음정이 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자신있게 그 테너보다 약간 높게 불렀다.
나는 노래를 부른 후 손을 치켜 들었으며,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많은 동료들이 소리나지 않게 환호하며 격려해줬다.
오후 9시 00분
연주가 끝났다.
다같이 인사를 하기 위하여 무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개별 인사를 하기 위하여 무대에 올라가자 뒤에서 "쿵쿵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 서있던 합창단원 동료들이 무대에서 발을 굴리며 나를 위하여 축하해 주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활과 손으로 보면대를 '톡톡톡톡' 치며 축하해 줬다.
관객들도 큰 박수로 축하해줬다.
모두들 활짝 웃는 얼굴로 관객들의 박수에 인사했다.
지휘자와 솔리스트 모두에게 꽃다발이 하나씩 주어졌다.
그 꽃다발을 보자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 아내생각이 났다.
많은 동료들도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 보이거나 나를 안고는 등을 두드리며 축하해줬다.
오후 9시 30분
연주가 끝난 후 극장 2층 라운지에서 리셉션이 있었다.
나도 그 자리에 꼭 참석하라는 극장 평론가와 사무국장 등과 함께 리셉션장으로 갔다.
극장 평론가는 한사람씩 한사람씩 소개하면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는 내가 어제 오후에 갑자기 이 역할을 맡아서 오늘 성공적으로 연주해줘서 고맙다며 소개했으며, 많은 관객들이 큰 박수로 축하해 줬다.
오후 10시
집에 돌아와서 연주 잘했냐는 아내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며 꼭 안아줬다.
***
지금 들으시는 음악은 'Ponchielli'의 오페라 'La Gioconda' 중에 나오는 'Danza delle ore' 라는 곡입니다
댓글 5
-
석찬일
2005.10.11 21:42
지난 주일(10월 9일)에 두번째 연주가 있었습니다. 이날도 Herr Kovács 가 아파서 제가 대신 그 역을 불렀습니다. 이날은 특히 아내가 관객석에서 제가 하는 연주를 지켜봐줘서 더욱 더 큰 힘이 되었습니다. -
박규서
2005.10.18 09:22
지지난주에 스탠딩 오페라라 재미 없을거라고 하셔서 안갔는데...쩝, 솔로로 나가시는거 알았더라면 꼭 갔을텐데...
아깝다!!!
지난 주일엔 플라떼는 덕분에 너무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그날 그 지휘자가 집사님이 비평글로 올린 그사람 맞아요?^^
어쨌거나 바로크 음악을 시디가 아닌 직접 연주하는 소리로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우연히 홈피를 찾았지 뭐에요. 가끔 들르겠습니다.
항상 승리하시고, 행복한 가정 되시길 기도할께요^^ -
석찬일
2005.10.19 17:17
네. 그날 그 지휘자가 비평글로 올린 그 사람 맞습니다. ^^
제 개인적으로 바로크 오페라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작품이라 생각되어서 지난 주에 권해드렸는데,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렇게 제 홈피를 찾아주셔서 감사하구요. 집사님 가정에도 항상 평화와 사랑이 넘치길 바랍니다. -
은령
2005.10.28 19:51
시간 시간 너의 초조했을 마음과 준비 과정들을 쭉 읽고 나니 갑자기 무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세계를 모르는 무지한 이 누나는 그냥 솔리스트로 노래 했나보다 하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큰 일이었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구나.
하나님은 참으로 짖궂기도 하시고 깜짝 이벤트로 우리를 놀래키신다는 생각을 했어.
가장 바쁜 그 순간에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먼저 그 말씀 앞에 무릎꿇을 수 있어서 참 고맙다.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감사를 잊지 말자.
우리의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니까. -
석찬일
2005.10.28 20:54
응, 전적으로 공감한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날마다 묵상한단다.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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