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성

제1과  비참한 그리스도인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오늘 제가 여기 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제 삶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간단한 메시지에 의해서 삶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메시지가 얼마나 새롭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회심하고 난 이후 29년 만에, 목사가 된지 17년이 된 이후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 주님께서는 제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내 신분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은혜 아래서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도덕주의라는 암 병에서 나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이 메시지를 나눌 때에, 그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있었던 변화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전문가로 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믿음 안에서 여러분과 한 형제로서 여기에 서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메시지 때문입니다. 저의 기도는 아주 겸손하게 이 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메시지에 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나왔습니다. 이 메시지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기를 가지고 활동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변화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수년 동안 제가 깰 수 없는 패턴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동기를 얻어 일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헌신하고, 다시 동기를 얻고 재헌신하고 다시 실망하는 사이클 속에 살았습니다. 저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주님 앞에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였을 때마다 주님께 충분히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주 바쁘고 활동적이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복음 증거를 위하여 바빴습니다. 언젠가는 하루 105가정의 문들을 두드렸습니다. 이런 많은 가정들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더욱 더 거룩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였을 때 주님께서 나를 더욱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저는 제 사무실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무실을 수요일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런 행위가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동기의 수준에서 저는 열정적이었으며 저는 이 동기의 수준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시간이 감으로 점점 더 침체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과 비교해서 수준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사이클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나를 자책하는 단계로 떨어진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책망했습니다. 왜 나는 좀 더 지속적이지 못할까? 나는 왜 믿음의 상태가 오르락내리락할까? 이런 단계 이후에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이런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나를 재 헌신의 단계로 이끌어 갔습니다. 주님 앞에 약속하며 더 잘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읽겠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나누며 섬기며 더욱 헌신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동기의 사이클로 들어갑니다. 동기, 책망, 재헌신의 사이클이었습니다. 항상 이렇게 반복됩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자유할 수 있을까? 지속적인 권능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지속적인 승리를 가질 수 있을까?

1990년 주님께서 나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길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신분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29년 동안 저는 율법주의적으로 살았습니다. 저의 심장은 주님을 위해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심장과 나의 신실함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내 머리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의 문제였습니다. 율법주의란 우리가 만든 시스템인데 삶을 발전시키려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보려고 하는 시스템입니다. 다른 시스템이 있는데 바로 은혜의 시스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십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 율법과 은혜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육신의 삶과 은혜의 삶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율법적인 삶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령 안에서 걷는 삶인데,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육으로 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제가 육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삶과 믿음의 삶을 비교해 봅시다.

1) 육신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자기 자신을 바치는데 몰두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흉하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육은 바로 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말합니다. 내 능력을 가지고 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삶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육은 내 능력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려는 노력입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목사님들이 육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면 어떤 사람들은 토요일 저녁에 술을 많이 먹어서 눈이 충혈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육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적인 삶은 자기 아내를 속이고 딴 살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회사의 돈을 횡령하는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육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삶은 이런 삶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삶을 드려다 보면 이것은 아주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3:4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립보서3:4)

바울은 ‘육적인 삶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을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육에 대하여 자랑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내놓을 수 있는 이력서입니다. 자기의 이력서를 내놓았을 때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갖고 있는 종교적인 육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신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내가 살아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걸음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인데 육적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

2)은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사시도록 맡기는 삶입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통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법칙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포커스는 예수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두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무엇을 하는가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은혜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였는가에 강조점을 둡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입니다.

2. 율법과 은혜의 체계

율법이 한 쪽에 있고 은혜가 다른 한 쪽에 있습니다. 이쪽에 믿음이 있고 저쪽에는 율법이 서로 반대되는 쪽에 있습니다. 율법과 은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은혜와 율법이 갖고 있는 근본을 봅시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의 근원이 에덴의 동산까지 갑니다.

1) 창세기 2장 8-9절을 보면 에덴동산에는 두 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2:8-9)

바로 이 나무들이 두 가지의 시스템을 이야기합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는 무엇입니까? 신약에서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무는 예수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만드시면서 사람은 생명의 나무를 인하여 살 것을 설계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생명의 나무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향한 처음의 계획이었습니다. 인간이 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교통을 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그 계획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15:4-5절의 내용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4-5)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 나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는 말합니다. 만약에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여러분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두신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디자인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할 때에 그분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열매를 거두십니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걸음은 내가 아닌 내 안의 예수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판단해 보십시오.

저는 미국의 남부에서 자라났습니다. 거기는 아주 복숭아들이 많이 납니다. 저는 과수원에서 놀았습니다. 그곳은 아주 고요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끙끙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거기에 복숭아 하나가 흔들리면서 복숭아가 떨어졌습니다. 복숭아가 더 많이 자라려고 더 많은 열매를 맺으려고 끙끙거리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큰 소리를 내면서 힘쓰자 열매가 더 많이 맺혔습니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입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에게 합류가 되었을 때, 그 안에 거할 때, 그 분이 우리를 통하여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생명의 나무는 예수를 가르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율법을 보여줍니다.

그 안에는 다른 나무가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이 나무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선악을 가려냅니다. 선과 악은 도덕을 규범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2:16-17)

하나님께서 이 나무에 대하여 이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의 나무를 먹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탄이 옵니다.

2) 사탄은 첫 번째 거짓말을 합니다. 뱀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뱀의 이야기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26-31)

뱀이 ‘나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창조된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은 ‘너희가 이것을 먹어야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같은데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너희가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이 거짓말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고 싶다면 제가 말하는 것을 행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렇게 해야 닮을 수 있다고 설교를 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그의 형상을 본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예수를 닮기 위해서는 이렇게 행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사탄의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뱀은 한 가지만 하라고 했지만 저는 교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하라고 요구했는지 모릅니다.

이번 만남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필요는 좀 더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거룩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미 주신 신분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스스로가 누구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스스로 이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율법주의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3)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여러 가지 결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고, 하나님과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높이 계셨고 사람들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던 자기의 신분을 그 때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분을 찾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이후 무엇을 보았습니까? 스스로 벌거벗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들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살아왔지만 서로 벗은 것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에 벌거벗은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왜 전에는 벌거벗은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를 바라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집중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에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이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계속 자신을 쳐다봅니다. 아담과 이브가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에 대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대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노력하여 그들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잎사귀로 가렸지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주의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라보고만 있지 스스로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과 행위를 통하여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보려고 하는 방법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은 가치의 세계에 의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일을 하고 어떻게 하면 나쁜 일을 피할 것인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 그들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선악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 선과 악이 같이 공존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도 악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도덕이 정해준 규범입니다. 그 이전에는 도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도덕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기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오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덕주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려내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도덕적인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늘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이미 경건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규칙 때문에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 결과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기의 행위에 퍼포먼스가 있습니다. 저는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경건한 행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넘쳐 흘러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삶의 핵심은 행위 중심의 삶입니다. 저는 전에는 행하라, 행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고 성도의 행위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으면 그분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 자연히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목사였습니다. 율법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눈과 손과 발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필요로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4) 육신의 삶의 핵심은 행위 중심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잘하셨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내가 없어도 됩니다. 우리의 섬김을 꼭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원하고 있습니다.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한다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도행전17:25)

하나님께서 무엇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의 섬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은혜 아래서 걷고 쉬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신앙생활에서 평안함을 절대로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아래서 쉬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율법주의에 끌려 다니게 될 것입니다. 육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즐길 수 없습니다.

육신의 삶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육신의 삶은 명성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 육신의 삶은 성취욕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육신의 삶은 자기에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 내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육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이런 것들이 왔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두 가정이 나옵니다. 가인과 셋의 가정입니다.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았는데 한 가정은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산 가정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4장 16-22절을 보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창세기4:16-22)

가인의 후예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습니까?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을 구축하고, 어떤 사람은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어떤 이는 음악가입니다. 이런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기록한 것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4:26)

그 때에서야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그들의 신분 안에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가정입니다.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세기4:6-9)

여기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그 행위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가 결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하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름을 물어본다면 그리고 이름 이상의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신다면 물어보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뇌 전문 의사입니다.”

“오 그렇습니까?”(놀라워하면서)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저는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래요!”(우습게 여기며) 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분의 가치가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육적인 삶, 율법적인 삶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강조하지만 은혜 아래서는 예수 안에 있는 나 자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의 삶의 핵심은 예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삶입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더 열심히’를 생각하지만, 은혜의 걸음을 걷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노력해서 입니까? 믿어서 입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노력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마리아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자매들이 조반 준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냄새가 좋습니다. ‘오늘은 사역을 그만하고 쉬면 좋겠다, 그러나 악한 사탄 마귀가 있으니 쉬면 안 되겠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까?’ 스케줄을 조정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설교할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니까 오늘을 병자를 많이 치유하여야겠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는 귀신을 쫓아내야겠다.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시니까, 그 이후에는 장례식에 가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야겠다. 그러면 오늘 하루가 멋진 하루가 될 거야.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을 하니까?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사역하셨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3. 은혜로 사는 삶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고 넘쳐흐르는 은혜로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교통 안에 넘치는 은혜로 살았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복음5:30)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한복음5:16)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요한복음8:26)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한복음8:32)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한복음12:49)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14:24)

예수님께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십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활기있게 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삶을 살게 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노력하여서 하나님을 위하여 산 것이 아니고, 기사와 표적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사도행전2:22)

성경은 기사와 이적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경우와 우리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20:21)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는데 너희를 통하여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5:19)

만약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몇 가지의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5:15절을 근거로 하면 전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이시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있었습니다.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행할 것을 믿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적어도 설교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픈 사람을 방문하고 상담을 하며, 행정을 하며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주님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보며, 모든 것을 다 더 해보라. 다 더하면 제로가 나온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그를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사역을 다 하십니다. 내가 어디에서 이 말씀을 전해도 대부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동행하시고 돕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면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를 통해 사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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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출처 : http://blog.daum.net/timberkang/10438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