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성

제8과  은혜의 삶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은 성경적인 교육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더욱 알아가게끔 우리의 눈을 열어주심과 같은 신령한 계시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무관심하고 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 그분은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한 갈급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를 더욱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가장 능력 있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는 것이 승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은 육적인 삶이 됩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위해 수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연합하고 동행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목표나 육적인 것으로 상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의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께 원수가 되는 일이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앞에서 기다려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너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 사람은 독수리의 날개 침과 같이 올라가며 뛰어도 피곤치 아니하며 걸어가도 곤비하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한 사람이 걷고, 걷고 걸었는데 곤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뛰고, 뛰고 또 뛰었는데 어떻게 피곤치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자기의 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힘을 의지하고 뛰고 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를 지켜주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닙니다.

1900년도 초기에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이 호수에서 펌프질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펌프질을 하니까 물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아주 열정적으로 펌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피곤할 줄 알았는데 피곤해 하지 않고 계속 펌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계속 저렇게 펌프질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사람은 펌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슈퍼맨인가? 다가갔더니 그것은 사람이 아닌 기계였습니다. 뒤에 스프링이 있었고 핸들을 붙잡고 있어서 계속 움직였습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물이 허수아비를 펌프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퍼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함으로 자동으로 터져 나오는 생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짐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할 때에 그분이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동적으로 능률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하여 사시고 그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제 8과의 은혜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은혜의 삶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감정을 다루려면

1)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감정을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때때로 진실과 반대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을 통해서 의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증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룩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정적인 느낌에 대하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진리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 내가 생각한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감정이 우리를 컨트롤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을 감정이 컨트롤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컨트롤하여야 합니다. 이런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합니까? 때때로 여러분이 의롭지 않다고 느껴질 때 여러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에게 하지 못할 말을 했을 때 아내와 싸웠을 때, 잘못된 생각을 하였을 때 여러분 삶 속에 죄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의롭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추해졌고 더러워졌습니다. 마음이 이야기합니다. 너는 의롭지 않아! 이러한 느낌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첫째로 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압니까?

2) 진리가 무엇인지 결정하십시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시편119:160)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불의를 느끼고 있을지라도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를 보면 성경은 나를 완전한 의라고 이야기 하고 모든 죄는 사하여 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골2:13-14 성경은 내가 거룩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고전3:17 성경은 내가 의롭다고 말합니다.

롬5:9 성경은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원수가 물처럼 밀려 올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대항하여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감정을 믿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뒤져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무엇이 진리인가를 규명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거룩한 것 같지 않다고 느끼면 원수가 나를 고소할 때에 나를 비판하고 나를 조롱할 때에 원수의 거짓말을 파괴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고 거짓말은 우리를 메이게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에 매여서 사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혹시 여기에서도 거짓말을 믿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는 하나님 앞에 다가갈 수 없어, 큰 교회를 이루지 못하여서 나는 인정을 받지 못해, 내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해야 돼.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이러한 거짓말을 폐해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거짓말을 그만하십시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5)

원수가 와서 너는 의롭지 않다고 합니다. 내가 성경말씀으로 이렇게 확신합니다. 그리고나서 그 거짓말을 파합니다. 이전에는 원수가 이런 거짓말로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내가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괴상망칙한 생각이 들어옵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하나님 너무 죄송합니다. 이런 생각이! 용서해주세요. 나는 추한 사람입니다. 왜 내 사역을 중지시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나를 지금 죽이지 않습니까? 왜 나 같은 추한 사람을 받아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생각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는 죄가 주는 생각입니다. 나는 진리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정죄들을 다 받고 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원수가 이런 식으로 나를 대적한다면 나를 정죄한다면 저리로 가라고 명하십시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죄가 다가온다면 사탄아 네가 나를 조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말하십시오. 내 생각이 아니라고 말하십시오. 그것을 폐하여 버리십시오. 우리의 생각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었다고 치고 이런 생각이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는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거짓말을 폐해버리고 나는 거룩하다고 선포하십시오.

우리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의롭다. 그리고나서 진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믿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거짓이 있습니다.

공원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타자고 했습니다. 내가 싫다고 하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째째할 수 있어요?”

“나 째째하지 않아! 타볼께. 야, 타러가자!”

그래서 거기에 타서 아들과 앉았습니다. 점점 더 높게 올라갑니다. 그 때 감정이 나에게 이야기 합니다. 내 느낌이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 죽을 거야! 너 진짜 죽을 거야.” 더 높이 올라 가면서 느낌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괜찮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탔잖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줄을 서 있었는데 앞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도 안 죽었잖아! 이 놀이기구를 만드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만들었을 거야. 사람이 죽었다면 이것을 폐쇄하지 그냥 두었겠어? 나는 안 죽을 거야.” 그런데 느낌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 죽지는 않아도 허리를 다칠 걸.” 그러는 중 다 올라가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나는 죽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생각이 납니다. 다시는 안탔습니다. 여러분 내가 느낌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느낌은 저에게 죽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감정이 거짓말을 가지고 말을 합니다. 감정이 말하길 너는 거룩하지 않아. 그 때 잠깐 기다려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지 그리고 감정이 한 거짓말을 폐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확인합니다. 감정과 관계없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감정들과 상관없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느끼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를 붙드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의롭습니다. 느낌이 무엇이라고 하든 우리는 의롭습니다. 그래서 의롭게 행동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다시 와서 말합니다. '네가 의롭게 행동한다고? 너도 네가 의롭지 못한 것을 알잖아? 네가 의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니? 너는 외식하는 자야.' 원수가 와서 우리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고소하는 것은 우리가 느낌에 반대되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사람은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의롭습니까? 믿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 때가 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질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의롭다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습 그래도 행동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그런 척 하는 거잖아? 나는 믿음으로 행하는 거야! 나는 믿음으로 살지 느낌으로 살지 않아!

3) 이런 감정들이란 즉시 바뀌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지속적으로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할 때 점차 진리와 나란히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갱신시킨다면 우리의 느낌도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느낌에 대하여 승리를 맞보게 될 것입니다. 감정이 여러분을 멈추게 하지 마십시오. 감정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감정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월요일 아침마다 나는 사역을 그만 둘거야!“ 라고 말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느낌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없애 버리십시오.

2.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1) 하나님의 뜻은 길이나 방법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람 그 자체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분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인격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고백합니까?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 만약 내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있지 않다면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던지 하나님과 연관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살고 싶다면 예수 안에서 발견된 여러분의 신분을 확인하십시오.

2) 하나님의 뜻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데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숨어 있어서 내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내가 나가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에게 계시되는 것이지 나가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들릴 수 있는 정도로 큰 음성으로 말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내가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책임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이 있습니까?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안식하고 기대십시오. 그분이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에게 충분히 충족시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화를 드립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서 가까운 호텔에서 묵고 있습니다. 저는 방향성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운전할 때는 아내가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내가 어디 간다면 항상 가는 길로 갑니다. 만약에 나 혼자 어디 간다면 다시는 아내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여기 교회를 떠나서 호텔에 간다고 해 봅시다. 내가 박목사에게 지도를 달라고 해서 지도를 보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약도 밑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적을 수 있습니다. 찾을 수 있는 다른 한 방법입니다. 만약에 박목사가 스티브 목사와 함께 동행해주겠습니다 한다면 그리고 어떻게 그곳에 가는지 보여준다고 하고 같이 차를 타고 나는 운전을 하고 좌회전 우회전하라고 말하고 호텔은 바로 저기에 있다고 한다면 박목사가 지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약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정확해 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씨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예수님이 다 이룹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한 것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나가서 그저 사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느 곳에 홀로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앞에는 멋있는 바다가 있습니다. 오른 쪽에는 지평선이 보이고 숲이 있습니다. 거기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뒤에는 꽃밭들이 있습니다. 그 뒤에는 높은 산이 있는데 꼭대기에는 아직 눈이 있습니다. 가운데서 여러분이 서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라는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이 어딘지 어떻게 압니까? ‘어디로 가기를 원합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잖아. 한번 쳐다봐.’ ‘나는 해변가가 좋은 데!’ ‘아 너는 바다를 좋아하는구나, 해변이 많은데 어느 곳을 좋아하니?’ ‘야자수가 있고 그물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요. 그곳이 굉장히 좋아요’ ‘정말! 좋아! 그러면 뛰어가 즉시 열심히 뜻을 다해 뛰어가! 그리고 자유함을 얻고 뛰어가, 뛰어!’ 저는 뛰어갑니다. 열정적으로 뀌어갑니다. 야자수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팔을 벌리고 있었는데 가보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스티브야 빨리 와,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그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나를 안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 내가 이곳을 선택하실 줄 어떻게 아셨어요?’ 예수님은 웃으면서 말씀 하십니다. ‘네가 선택한 것 같으니? 내가 선택한 것이다. 누가 너로 하여금 해변가를 좋아하게 만들었는데? 그 야자수 위에 침대를 누가 보게 만들었느냐? 네가 아니라, 바로 나였어!’ 예수님, 당신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것을 바로 은혜라고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지 보십시다. 두려움으로 삶을 바라봅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어디로 가야 됩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이야기를 해주세요. 무엇을 하고 싶은데요? 해변가를 가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아닐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완전히 뒤틀려진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토록 하고 싶은 사역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을 때 여러분의 열정과 비전을 컨트롤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그냥 놔두고, 제일 하기 싫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오해입니까? 어떤 경우에는 해변가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염려하므로 갑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해변가로 가는데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나는 저기로 가야 하는데 이쪽으로는 가기 싫습니다. 나는 가기는 가야 합니다. 원수에게 조롱 당하지 않게 기도해 주세요. 사탄은 속이길 잘하잖아요. 믿는 사람도 잘못된 길로 가는 수가 많이 있잖아요.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탄의 역사가 있잖아요? 차라리 사탄을 찾아가십시오. 하나님 보다 사탄을 더 두려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탄이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게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떨어질 때 잡아주시겠다고.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삶의 소원을 이루시고 여러분의 생각의 소망을 이루십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서 있으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안 보내 주시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 친구 중에 사역을 떠난 분이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선택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시길 원하십니까? 어떤 결정을 해야 합니까? 날짜가 가기에 무엇이든지 결정해야 합니다. 더 안타까워서 하나님 무엇이라도 말씀을 해주세요. 결정해야 될 날짜가 다가 왔습니다. 그는 너무 절망가운데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왔습니다. “네가 결정하길 원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결정을 믿는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결정을 믿는다는 사실을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결정하실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십시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잠28:1)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영을 준 것이 아니라 담대한 능력을 주셨다고 합니다.

믿음 안에서 행한 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때때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내가 해변가로 뛰어갑니다. 그쪽으로 가니까, 햇살은 쏟아지고 바람이 불지요. 내가 생각한 대로입니다. 그곳에서 그물 침대에 누어서 쉽니다. 잠깐 후에 수평선에 구름이 올라왔습니다. 잠시 후 그것은 폭풍이 되었습니다. 그 폭풍이 나에게 다가옵니다. 허리케인이 왔는데 야자수를 붙들고 살아보려고 바둥바둥 거립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곳에 왔구나! 내가 왜 여기 왔지. 하나님의 뜻을 내가 피했구나.”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제가 알라바마에서 조지아로 간 것은 주님께서 인도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큰 교회를 이루어 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리케인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증명하여 주신 줄 아십니까? 내가 그의 뜻을 놓친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했던 것 말고 다른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그곳에 데려간 곳은 나에게 프로모션을 주려고 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나의 수준을 높이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거기로 가라고 했지 왜 거기 가야 했는지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주님은 나를 밑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놓쳤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하나님이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못된 장소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대부분이 목사님입니다. 목사가 낙심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잘 이해합니다. 목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잘 압니다. 죽고 싶은 생각 이해합니다. 주님께서 데려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대로 안 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의지하고 믿으십시오.

당신의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하나님의 차선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짓말은 믿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여러분을 어디로도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폐기시킬 수 없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단4:35)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다 합니다. 그러므로 자유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찾는 것이 여러분의 일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하나님 앞으로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만한 크기로 말씀하십니다. 제 아들이 10대였을 때,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데이빗에게 밖에서 풀을 깎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풋볼 게임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데이빗 정원에 까서 풀을 깎어!” 그러나 그는 정신이 팔려서 듣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데이빗!!!” “예!” “정원에 가서 풀을 깍으란 말야!” “아 알았어요.” 제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데이빗에게 ‘어떻게 내 말을 못들을 수 있어 한 쪽 귀는 나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거 아니야!’한다면 이는 얼마나 바보 같은 말입니까. 데이빗은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크게 이야기 하였을 때 그는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3. 은혜의 삶을 살려면

1)성경공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삶으로 사는 것이지 글씨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순종하지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삽니다. 성경을 공부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졸업 앨범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앨범에 보니 예수님이 매 장마다 나옵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여기에도 있네,’ 신약에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구약에 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있지? 아 여기 있네. 뒷 배경에 있구나. 멋있어.’ 구약에는 뒷 정원에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하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공부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입니다. 거기에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하는 목적은 우리가 성경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성경을 몰라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문제들입니다. 만약에 성경을 지식을 얻기 위해서 배운다면 그것은 상처만 줄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해서 지적인 수준만 올라간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픔이 될 것입니다. 고전에 보니 왜냐하면 지식은 튕겨 나온다고 합니다. 신약에 보면 성경에 대하여 통달한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대부분 외워서 사용합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39-40)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을 연구함으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느냐?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바로 나인데 나에게는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에서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생명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2) 기도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기도는 행위가 아니고 삶의 태도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대화의 장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눈감고 달리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매 번마다 기도를 입으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와 대화를 많이 나눕니다, 때로는 침묵을 지킬 때도 있습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도 괜찮습니다. 만약에 말 안하는 이유가 있다면 문제이지만, 좋은 사이인데도 말 안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열린 서로의 교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삶의 태도입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에게 계속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하러 왔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떠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7)

그가 우리에게 또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려고 시간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고(이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것 이상입니다. 하나님과 열린 교통을 하는 것이 기도의 개념입니다.

3) 복음증거

복음은 전염성을 지닌 예수님에 대한 열정입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4:20)

완전한 복음은 용서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좋은 소식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오는 죄 사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서도 나눕니다. 지상 명령을 전할 때에 가서 죄 사함만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복음 증거를 하는데 있어서 외부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훈련시킴으로 그들이 예수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발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제자훈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4) 교회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이 모인 가족입니다. 교회는 빌딩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전부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여러분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족이 있다면 가족에는 여러 사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12:5)

교회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가지고 있는 신분에 대하여 깨달은 이후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가족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교인들은 그룹 안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던지 교회 안에 있으면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자꾸 제한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주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루는 다리를 걷고 있는데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뛰어갔습니다. 그가 이야기합니다.

“말리지 마세요. 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안 됩니까?”

“삶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데요!”

“무엇이 있는데요?”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갖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카톨릭입니까? 개신교입니까?”

“개신교입니다.”

“나도 개신교입니다. 성공회입니까? 침례교인입니까?”

“침례교인입니다.”

“나도 침례교인입니다. 하나님 성회의 침례교회입니까? 주님의 교회의 침례교입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침례교회입니다.”

“오리지날입니까? 개혁입니까?”

“개혁주의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1879년도에 시작한 것입니까? 1915년도 시작한 것입니까?”

“1915년도에 시작한 하나님의 침례교회입니다.”

“오 그래요. 안타깝군요.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1879년에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율법주의가 바로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의 걸음을 걸을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가족들은 모든 사람을 포용합니다. 방언을 하는가 못하는가, 침례를 하는가 세례를 주는가, 칼빈교회인가, 알미니안인가, 셀 교회인가 전통주의인가, 기도를 크게 하는가 작게 하는가?... 주님을 의지하면서 마음대로 하십시오. 사람들이 물어보면 내가 왜 하는지 설명하십시오. 사람들이 내 위치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을 그대로 포용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믿는 자들이고 그들의 삶은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직접 가르치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들로 인하여, 함께 공부한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여러분 주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여러분에게 계시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날 때, 그리고 진리를 사용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목사로서 복주시고 그래서 여러분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온전히 인도하는 목사님 되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을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신을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를 통해 살아 가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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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출처 : http://blog.daum.net/timberkang/10522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