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성

제7과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라

스티브 맥베이(영락교회 NCD 은혜의 영성 컨퍼런스 강의 내용 중)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신실하게 헌신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용납이 좌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너는 착한 아이이니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실 거야.”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의 행위가 결단코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은혜로 그렇게 하길 선택하셨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용납을 얻기 위해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용납하시도록 예수님이 이미 모든 일을 다 해두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전적인 용납을 개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전적으로 용납하고 계십니다.

1. 정확한 예수님의 생명을 완전히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성에 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예수님의 생명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누리며 살 것인가에 대하여 7과에서 배우겠습니다. 신학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줍니다. 우리는 죽은 교리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교리의 가치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교리들은 삶으로 살아질 때에 가치가 인정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는 데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

첫 번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이미 받은 죄사함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분야에서 사람들이 많이 얽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신분을 발견한 사람이 그 생명을 가지고 살기가 힘든 것이 바로 이 두 분야에 대하여 잘못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념은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과 상황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삶속에 있었던 큰 영향들에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가르칠 때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이 갖고 있는 육신의 아버지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사랑스럽게 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설명하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율법주의로 만성되어서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해 보이겠습니까? 이 질문을 적으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천국에 가면 놀라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던 하나님이 아니더란 것입니다. 7과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7가지 개념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적인 고용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적인 고용주로 봅니다. 그분은 고용주고 여러분은 직원입니다. 여러분은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다면 늘 상관을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살 것입니다. 종업원들은 일을 조금하고도 상관을 만족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들은 야단맞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관으로만 알고 있다면 무엇인가를 그를 위해 계속 하지만 그것은 최소의 것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인이십니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이상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종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고용주고 우리를 샀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회사에 들어갔는데 그 회사 사장이 아버지라면 그 회사에서 일하는 자기의 자세가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내 보스가 내 아버지라면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방식이 바뀔 것입니다. 그 회사는 아버지의 것일 뿐 아니라 내 것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그것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고용을 받은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엄청난 것을 상속받게 될 상태에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4:4-7)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다. 아들이면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라고 합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자신을 표현할 때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종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출21:6)

희년이 되면 종이 자유할 수 있는데 그러나 종들이 더 있기를 희망한다면, 그들이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떠나기를 싫어하면 문설주에 귀를 뚫으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상전을 섬기는 것이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전을 너무나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너무나 섬기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종이 되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혹한 심판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살펴보시면서 언제 실수하나 지켜보는 분이신줄 아십니까. 이것은 두 번째로 잘못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혹한 심판자로 보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상에 앉아서 내가 언제 실수하는지 바라보는 분이라고...

‘또 실수 했군! 너는 언제 성숙할 것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나 가혹한 하나님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줄은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그 참을성 없는 부모가 아이들을 때리는 식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삶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나오는 기쁨을 앗아갈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닙니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일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일지라도 나를 싫어하고 있다면 그분 앞에 나가기 힘든 것입니다.

멀리있는 하나님

세 번째로 어떤 경우에는 멀리 있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본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작은 일에 대하여서는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굉장한 일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큰 왕으로서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2:13)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이 된 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까이 되었다는 말은 서로 껴안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지구를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제일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이 세가지가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개념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심판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침에 운전하려고 나왔는데 차가 펑크가 나 있으면, “아침에 성경을 다 읽었어야 하는데, 내가 15분을 더 기도했어야 하는데”생각하고 그 바퀴 위에 안수합니다. 그리고 그 바퀴를 빼고 갈아 끼웁니다. ‘보험을 들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나는 싫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거야’이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잘못된 일을 보면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했구나’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삶은 불쌍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사람도 자녀에게 그럴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면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기울여야 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웃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웃고 계신다고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요? 세상에는 너무나 심각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웃는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드를 굉장히 부드럽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믿는 모든 자의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빈 무덤은 하나님에게 웃음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승리가 쟁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아주 좋은 무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3:17)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대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 이전의 일입니다. 십자가 이후의 백성들에 대한 열정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하여 기뻐하시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흥분되어 있는 하나님을 상상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를 바라보면서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위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한사람을 보십니다. “모세야, 엘리야야, 아브라함아 다윗아 다 이리와! 봐라! 천사들도 다 와서 보아라! 이 아들을 보아라. 얼마나 아름답니! 내가 만든 아들이다! 너무나 아름답다. 너무나 자랑스럽다.” 엡2장에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원토록 이 사람을 사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 전부를 반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사랑하십니다.  

제가 인디아에서 가르칠 때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코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가 없었고, 어떤 이는 발과 손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 한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놀라워하시는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아십니까?” 그러자 나병에 걸리신 분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기쁨이 흘렀습니다. 이 전에 아무도 그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까? 정말로 알고 있습니까? 정말로 여러분의 귀중함을 알려준 자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이 안에 오신다면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당신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쓰다듬으시며 “나는 너를 너무 너무 사랑한다. 너는 너무나 귀한 존재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의인이고 너 혼자 죄를 지었다 해도 너를 인하여 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원했는가하면 천상을 버리고 이곳에 내가왔다” 말하면서 여러분을 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진짜입니다. 그분은 사랑하시며 웃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계실 때 화가나서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너 왜 잘하지 못했니?”하고 야단을 치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손자와 손녀가 있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입니다. 19살에 장가를 가서 2년 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장님과 딸이 결혼을 하여서 아이를 나습니다. 손녀의 이름은 한나입니다. 손자는 요나단입니다. 제가 손자를 안아서 위로 올려서 웃겼습니다. 그리고 얼렀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런지 심장이 사랑으로 뛰었습니다. 내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큼 다른 것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이 때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내 손자와 놀며 내 셔츠를 벗고 내 침대에 누어서 아이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왝하고 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굴에 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옆으로 던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닦고 그를 다시 안았습니다. 여러분 그 아이가 토한 것 자체를 칭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는 나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나는 그 아이를 그대로 사랑합니다. 그 아이가 자랄 것을 믿고 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의 행위가 항상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러분을 옆으로 치워 놓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안으십니다. ‘너는 잘 할거야.’하며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며 우리를 지지하십니다.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로 완전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 여자들은 한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나이가 많아져서 늙어갑니다. 저는 46살입니다. 제 아내는 45살입니다. 그녀가 18살 때 그리고 저는 19살 때 결혼하였습니다. 나의 아내는 가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늙어가고 있어, 나의 엄마와 똑같이 생겼잖아!”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워” “내가 얼마나 늙었는데?” “나는 상관 안해” (물론 46세인데 26세의 형상은 아니지만 그 차이점이 있지만)  “나에게는 당신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당신의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많은 믿는 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잘못된 것을 자꾸 들추어냅니다. 그러나 신랑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너는 완전하지 않지만 나는 상관 안해”하고 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 여러분을 선택하지고 구원하신 분이 여러분이 완전하지 않다고 여러분을 버리신다고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19-22)

성도들이 어느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친절하며 온유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죄 없이 산다는 말은 안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실망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저는 아장아장 걸음을 배우는 어린 손녀에게 걸음을 가르쳤습니다. 그 아이가 자꾸 찻길로 가려고 합니다. 내 손을 놓고. 그러나 절대로 저는 그 손을 놓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걸려서 넘어지고 다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네가 계속 끝가지 손을 잡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가셔서 하나님의 실제가 무엇인지 설교하십시오. 한국교회에는 이런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루에 일곱 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시간이 없어서 1분을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히 받아 들이셨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기도하고 싶어서 안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에서 은혜주의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행하시던 간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게 말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덜 용납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행하는 행위에 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한 신실하심에 의해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삶을 풍성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2. 그의 생명을 완전히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생명을 완전히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심의 개념에 대해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용서함을 받았다는 개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받았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았습니다.

공의는 우리가 받을 만한 당연한 것을 받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공의라는 것은 내가 한 행동에 대하여 마땅히 받을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공의만을 주장하시는 분이 아닌 것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받을만한 당연한 것을 받지 못할 때 주어집니다.

한 여인이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보고 말합니다. “이 사진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못했어요!” 사진사가 사진과 사람을 같이 보았습니다. “아주머니, 공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진에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공의는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마땅히 받아야 될 벌을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받지 못하는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아야 마땅합니까? 지옥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써 그것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엡2장에 보면 하나님은 자비가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지비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자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쓰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반쪽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당신의 구원을 이야기 해보십시오?’하고 물으면 “나는 죄사함 받아서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까지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들은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순수하고 완전한 복음은 자비에 은혜를 더합니다.

은혜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시는 그분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구원이란 죄가 없어진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이것이 여러분의 지옥행을 막아줄 지는 모르지만 그 다음 것에는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합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초월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경험하는 기적적인 삶입니다. 자비와 은혜입니다. 죄사함과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비와 은혜는 두 가지입니다.

한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과속하면 걸립니다. 벌금 물고 점수가 가산됩니다. 제가 병원에 있는 교인을 심방하기 위해 가고 있었습니다. 큰 길에서 작은 길로 들어서서 속력을 줄였어야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속력을 줄이지 못했습니다. 계속 운전하고 가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경찰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누구인지 아시지요? 그는 경찰이었습니다. 그 때의 기분을 아시지요. 경찰이 왔습니다.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십시오. 맥베이씨. 얼마나 빨리 운전하셨는지 아십니까? 잠깐 밖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경찰차 앞에 앉으십시오.” 저는 지옥에 간 목사였습니다. 혹시 교인이 볼까봐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경찰을 티켓을 쓸려고 그 공책을 열었습니다. 볼펜을 찾고 있을 때, 제가 말했습니다. “한번 봐주십시오. 성경에도 구하면 준다고 했기에 말했습니다.” 그 경찰이 나를 보더니 티켓을 보고 다시 나를 보고 티켓을 보고. “알았습니다. 용서해주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과속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내 차로 갈 때에 나는 자비를 느꼈습니다. 나는 티켓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과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비를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 경찰관이 은혜를 베풀었네!” “아니 은혜는 안 베풀었어, 그는 자비를 베풀었어.” 은혜는 아니었습니다. 은혜를 베풀었다면 아마 이런 일이 있었야 할 것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냥 가지 말고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무엇이고 사 먹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내가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내가 받지 못할 선물까지 받았으니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지옥에서부터 막아주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받지 못할 선물을 쥐어주는 것입니다.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자비도 주시고 은혜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사함만을 위하여 오셨다고요? 죄사함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영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용서된 삶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용서하신 이유는 진짜 선물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무엇이 있다고 합니까? 죄사함이 있다고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무엇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36)

생명의 떡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생명의 떡이 내려와서 무엇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생명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6:40)

제가 이렇게 많은 성경구절을 찾은 이유는 여러분이 교회에 가서 구원은 죄사함 받아서 천국에 가는 이야기를 그만하게 하는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그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바로 구원은 천국을 마음속에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또한 생명도 받습니다. 구원을 주실 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에 대하여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2) 우리는 완전히 용서받았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3-14)

성경이 말하기를 예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고 계십니다. 시작과 끝을 보고 계시며, 중간에 있는 여러분의 인생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져갑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의 몇가지 죄를 위해서였습니까? 모든 죄를 위해서입니다. 의문에 쓰인 율법에 의하여 죽었던 우리가, 마치 청구서에 우리가 물어야 될 돈이 쭉 적혀있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예수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죄를 가지고 올라가셨을 때 몇 가지 죄를 가지고 가셨다고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이야기 하셨을 때 몇 가지를 말하신 것입니까? 모든 죄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였을 때 몇 가지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까? 모든 죄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밖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은혜가 우리를 감싸 안았다면 로마서 6:1절의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은혜를 더 크게 하려고 죄를 더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어찌 죄에 대하여 살리오! 어떻게 죽은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죽은 사람이 무엇을 합니까? 감각이 없잖아요?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이 죄악 속에서 살아요?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시체가 되었잖아요?  우리는 물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닙니다. 그 본성은 없어졌습니다.

과거의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죄는 어떻게 용서됩니까? 아직 죄를 짓지 않았는데?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여러분은 아직 없었는데 그분이 진 죄의 대가는 몇가지 입니까? 전부 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여러분의 죄는 모두 미래였습니다. 시간이 하나님을 묶어두실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시간에 관계없이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십니다. 모든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저에게는 아직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는데 그래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미 십자가에서 용서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죄를 짖고 “나를 용서해주세요!” 나는 이미 용서하였다. 그러면 고백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자백과 죄사함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사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는 이미 하나님께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가르치면 큰일 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을 결코 죄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말하게 할 것입니다.

3)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거나 멀리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전 6:17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내가 지금 저쪽으로 옮겼는데 주님은 어디계십니까? 우리 안에 계십니다. 어딜 가든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전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저항했습니다. 29살이었고 사역에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주먹을 하나님 앞에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내 등을 돌리고 걸어갔습니다. 화가 나서 아주 멀리 갔습니다. ‘내 열심있는 사역도 이제는 없습니다.’ 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내가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가려고 했습니다. 돌아보았을 때 한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따라오고 계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온 길을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내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아직도 화났니?” “아니요 이제는 화 안내요.” “그러면 빨리 와 내가 안아줄게.” 오 신실하신주! 나는 신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멀리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있는 것 같아! 하나님이 멀리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인데 멀리 갈수 있습니까?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데 멀리 갈 수 있습니까? 내가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어떤 성명서를 만들 텐데 이 성명서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에 대하여 화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화나게 할까요? 제가 사전과 컴퓨터를 화에 대하여 찾아보았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것을 줄치면서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것은 꼭 한가지 일로 분노하였습니다.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모든 이유는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절대로 화내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짓는데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켰습니다. 여러분의 죄에 대한 모든 분노가 거기에 쏟아졌습니다. 죄에 대한 사함을 주었을 때,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죄 때문에 분노하신 적은 없습니다. 죄의 대가에 대하여 고민하여 본 적이 있습니까? 그 결과는 십자가에서 끝났는데 왜 고민합니까?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다시 생각을 바꾸어서 혼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는 끝났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죄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실망하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실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실망이란 기대치에 차지 않았을 때 오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기대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때 실망하지 않습니까? 나에 대하여 실망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해 실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실망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그럴 줄 정말 몰랐다”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살다가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너 그럴 줄 알았어,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알고 있었어. 그러나 나는 너를 선택했어.” 많은 믿는 자들이 정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언짢아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정죄하고 책망합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느낄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망을 주실 때는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하고 이것을 버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망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의 죄를 용서받았습니까? 모든 죄. 그런데 왜 밖에서 죄인처럼 삽니까? 성자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처럼 사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닙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과 영생에 대하여 감사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요1:12     그는 나를 그의 가족으로 불렀다.

요15:1-5   그는 나를 그의 친구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요15:6     그는 나를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선택했다.

행1:8      그는 나를 증인이 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롬5:1      그는 나를 용서했고 의롭게 만들었다.

롬6:1-6    그는 나를 죽음의 죄의 힘에서 일으켰다.

롬8:1      그는 나를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고전1:30   그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했다.

고전2:12   그는 나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래서 나는 그에 의해서 나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다.

고전6:19   그는 그의 값으로 나를 샀고, 만들었다.

고후1:21   그는 나의 상속할 유산으로 성령을 주셨다.

고후5:17   그는 나로부터 새로운 인격을 만들었다.

갈2:20     그는 나의 소중한 삶이 되었다.

엡1:3      그는 나에게 모든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엡1:4      그는 내가 새롭게 태어나기 이전에 나를 선택했다.

엡1:5      그는 나를 그의 양자로 택했다.

엡1:7-8    그는 나에게 그의 은혜를 아낌없이 주었다.

엡2:5      그는 나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엡2:6      그는 나를 일으켰고,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엡2:18     그는 나를 성령을 통하여 그에게 직접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빌3:20     그는 나에게 천국의 시민이 되게 하였고, 거기에 그와 함께 앉도록 하였다.

골1:13     그는 나를 어둠으로부터 빛의 왕국으로 옮겼다.

골1:14     그는 나의 생애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

골2:7      그는 나를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였고 그의 위로 자라게 했다.

골2:10     그는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하였다.

골2:11     그는 나를 원죄로부터 구속하였다.

골2:12-13  그는 나의 옛사람을 장사해버렸고, 새로운 사람으로 나를 일으켰다.

딤후1:7    그는 나에게 성령의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셨다.

딤후1:9    그는 나를 하나님의 사역의 한 부분으로 만드셨다.

히2:11     그는 나를 성화시키셨고, 그의 형제라고 불러주셨다.

히4:16     그는 나에게 그이게 나아가는데 담력을 주셨다.

벧전2:5    그는 나를 살아있는 돌로 만드셨고, 그의 영적인 집에 한 부분이 되게하셨다.

벧전2:9    그는 나를 선택된 족속, 특별한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벧후1:4    그는 나를 대단히 위대한 사람과 거룩한 나라에 동참하게 될 귀중한 약속을 주셨다.

요1서1:9   그는 모든 불의로부터 나를 계속적으로 깨끗케 하셨다.

요1서5:18  그는 나를 사탄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