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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리스트 2

    2005.02.20 17:00

    석찬일 조회 수:1196 추천:19





    따르르릉...

    2005년 2월 14일 오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석선생님이신가요? 여기 함부르크 ZBF(독일국영에이전시)인데요. 지난번에도 한번 연락드렸었는데 지난번에는 병가중이라고 하셨지요? 2월 17일에 플렌스부르크 극장에서 라트라비아타(춘희)공연이 있는데, 혹시 바론 듀폴 역을 해 주실수 있으신가요?"

    그 말을 듣고보니 전에 언제 한번 그런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났다.
    그 때 '병가만 아니었더라면 흔쾌히 가서 공연할 수 있었을텐데...'라며 적잖이 안타까와했던 기억이 생생히 났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나를 찾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 굉장히 반가왔다. 지난번 분명히 다른 사람이 공연하러 갔을 것이고, 또 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 사람이 크게 잘못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다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왜 지난번 불렀던 사람을 찾지않고 나를 찾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어쨌거나 나를 잊지않고 다시 찾아준 것만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2월 17일 일정표를 보았다.
    '이런... 우리국장에서 안나 볼레나 공연이 있네... 쉽지 않겠군...'
    17일 오후일정이 합창연습이라면 지휘자의 양해아래 큰 문제없이 플렌스부르크 극장으로 갈 수 있으나, 킬 극장에서 공연이 있다면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원 소속이 킬 극장 합창단원이므로 킬 극장의 공연에는 최우선으로 배정되며 꼭 참가해야하기 때문이다.

    내게 전화를 한 함부르크 ZBF 에이전시 담당자에게도 내 사정을 설명했더니, 우리극장 합창 지휘자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배려를 해 줄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 자기에게 다시 전화를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즉시 합창 지휘자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자동응답기만 돌아갔다. 나는 비교적 상세하게 멧세지를 남겼으며,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하였다.

    잠시 후, 합창 지휘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킬 극장에서 공연이 있을 경우, 다른 극장에 공연하러 가는 경우가 없으나, 이번 나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휴가를 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평소 내가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였으며, 특히나 합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솔로로 가는 것이기에 기꺼이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고마왔다.

    나는 함부르크 ZBF 에 전화를 해서 합창지휘자가 허가해줬으며, 큰 문제없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잠시 후, 플렌스부르크 극장에서 전화가 왔다.
    2월 17일 라트라비아타 공연에 바론역을 이태리어로 해 줄 수 있냐고 확인하였으며, 의상을 위해서 내 신체치수는 킬 극장 의상팀에 물어보겠다고 하였다.

    오후에 킬극장 무대연습에 참가한 나는 그곳에서 합창지휘자를 만나서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한 후, 휴가신청서에 지휘자의 싸인을 받았다. 그 후 담당부서에 휴가신청서를 제출했다. 담당부서장의 싸인도 받았으며, 다음날 아침 극장장의 결제만 받으면 되었다.

    다음날 오전 극장에 출근해서 담당부서에 가서 휴가신청서에 결제가 나왔다며 그 서류를 받아 왔다.

    그리고 오후에는 플렌스부르크 극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17일 오후 2시30분에 플렌스부르크 극장 의상실에서 내가 입을 옷을 입어본 후 필요한 부분을 좀 더 고치고, 오후 3시부터는 트라비아타 연습비디오를 보면서 내가 해야할 연기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다.

    2월 17일 낮 12시 반쯤 집을 떠나 플렌스부르크로 향했다.
    킬에서 약 90킬로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플렌스부르크까지 한시간정도면 갈 수 있지만, 처음 가는 길이기도 하며, 또한 극장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기에 여유있게 출발한 것이다.
    게다가 고속도로에서 가능하면 시속 100킬로미터 정도로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상 어느정도의 여유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큰 어려움없이 플렌스부르크 극장을 찾아간 나는 근처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주차요금을 내고 싶었지만, 그 유료주차장의 경우 최장 주차시간이 2시간이어서 오후 2시쯤 도착한 나는 오후 4시쯤 다시 한번 주차증을 발급받아야 했다.(일반적으로 독일 유료주차장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차비를 내며 저녁/밤 시간은 무료이다)

    나는 오후 4시까지의 주차증을 일단 발급받아 차 운전석쪽에 놔 둔 후, 극장에 가서 의상실에서 옷을 입어보고, 비디오를 보며 내가 해야 할 연기파트를 집중 분석하였다.

    비디오분석까지 끝난 후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반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비디오분석은 오후 6시였다.
    나는 차에 가서 뒷좌석에 앉아서 그 전날 준비한 트라비아타 시디를 들으면서 악보를 보며, 어느 순간에 어디로 이동하며 어떻게 연기해야 하나 꼼꼼히 체크하였다.
    또한 아내가 정성껏 준비해 준 빵과 과일을 먹고 따뜻한 차도 마셨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나는 다시 주차증을 발급받아 차에 놔 둔 후, 플렌스부르크 시내를 잠시 둘러보았다.
    날씨가 추워서 시내를 그냥 둘러보는 것 또한 그리 내키지 않았다.
    나는 맥도날드에 들어가서 너겟과 커피,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시디에서 흘러나오는 라트라비아타 음악과 함께 악보를 보았다.
    '그래. 이부분에서는 이쪽으로 가야하고... 음... 여기서는 이런 동작을 취해야하고...'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 나는 맥도날드를 나와서 다시금 극장으로 갔다.
    대기실에 가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악보를 보며 시간을 보내었다.

    6시가 가까와지자 조연출이 와서 다시 한번 비디오를 보면서 연기분석을 하였다.

    오후 7시 20분에는 분장실에 가서 분장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플렌스부르크 솔리스트로 활동하시는 메쪼 소프라노 서선생님을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7시 40분쯤에는 조연출과 함께 무대에 직접 올라가서 내가 움직여야 할 동선을 확인하였다.

    이윽고 오후 8시...
    공연이 시작되었다.

    심금을 울리는 라트라비아타의 서곡은 언제 들어봐도 너무나도 아름답다.
    음악에 심취해 있는 것도 잠시... 곧이어 나도 무대에 올라갔으며, 많은 동료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플렌스부르크 합창단에서 활동하는 많은 한국분들께서 특히나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셨기에, 더 가족적인 분위기로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조연출은 연주 후 내게 와서, 완벽하게 잘 해줬다면서 고마와했다.
    다른 솔리스트와 합창 단원들도 자기들과 같이 쭉 연습한 사람과 함께 연주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내가 자연스럽고 긴장하지 않고 연주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 중 임인택집사님은 내게 물과 오렌지를 주셨으며, 나일두 형님은 과자와 오렌지쥬스를 주셨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운데 남는 시간을 보냈다.

    공연 후에는 나일두 형님과 함께 차를 한잔 마시면서 독일생활, 합창단 생활 등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 11시 반쯤 플렌스부르크를 출발해서 천천히 안전하게 다시 킬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2월 18일은 킬 극장에서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연주가 있어서 나는 정원사인 안토니오 역으로 또 다시 솔로 연주를 하였다.

    2월 19일 다른 동료들과 이야기 하던 중, 2월 17일 갑자기 제2 베이스 파트의 동료 한명이 병가를 내어서 그날 안나 볼레나 연주때 제2베이스에는 3명만 자리했으며, 그 때문에 내가 휴가를 받았는 것이 문제가 될 뻔 했으나, 합창 지휘자의 배려와 결단, 그리고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이해로 그냥 잘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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