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도쿄필하모닉을 지휘한 도쿄 분쿄의 공연장 로비에서 포즈를 취한 정명훈씨. 정씨는“음악을 하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겸손”이라고 말했다.
/사진작가 미우라 코이치 제공  

조선일보 2003년 5월 14일자
[무대와 사람들] 마이웨이/<16> 지휘자 정명훈

"내가 받은 만큼…어린이 음악교육 힘쏟고 싶어"
  

최근 일부 언론이 ‘정명훈이 로마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직을 사임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확하다. ‘사임’이 아니라 앞으로 남은 임기가 끝난 후 연장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나의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직 임기는 2005년까지이며 그 이후에는 연장 계약할 의사가 없음을 오케스트라측에 알린 것이다. 그렇게 미리 알려야 후임을 정할 후 있기 때문이다(후임은 안토니오 파파노로 정해졌다).

이런 나의 결정은 어떤 오케스트라와 어떤 음악활동을 할 것인지, 지휘자라면 피할 수 없는 숙고와 원려(遠廬)의 결과다.

나는 몇 해 전부터 여러 오케스트라로부터 음악감독(상임)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음악감독이란 피할 수 없는 행정, 재무, 정치적인 업무량으로 인하여 음악활동에 상당한 지장을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음악인으로서의 책임 수행과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직책을 맡기 전에 우선 현재의 입장부터 정리해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프랑스에서 지난 20여년간 배우고 활동하며, 지휘자로서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웠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음악적인 발전을 위하여 앞으로는 독일에서 더욱 많은 지휘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 생의 반을 이탈리아에서 보낼 만큼 이탈리아를 좋아하고 이탈리아의 많은 음악인과 음악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 앞으로도 산타체칠리아와 계속 음악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 나오면서,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음악과 더불어 살았던 것 같다(음악이 처음부터 나에게 강요된 것도 아니었거니와, 또 내가 음악을 어떤 특수한 목적이나 필요에 의해 의무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음악은 자연히 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시애틀로 왔다. 어린 시절을 장난꾸러기로 지냈다. 중학교 때는 운동이란 운동은 죄다 좋아해서 한때는 프로 미식축구 선수가 되는 꿈을 가진 적도 있었다. 네 살부터 시작했던 피아노를 가장 소홀히 했던 것이 이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절에 집중적으로 받았던, 나의 피아노 선생님 제이콥슨 부인의 사랑이 듬뿍 담긴 가르침은 내게 피아노의 기술적인 면보다는 예술적인 면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너무나도 훌륭한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것이 나를 음악인으로서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내가 지금 가장 관심을 갖고 추진하는 일은 어린이 교육에 관련된 여러 가지 계획들이다. 음악의 아름다움과 가치와 심오함을 내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기초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방향과 시각을 제시해 주신 그 선생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교육과 훈련의 과정을 마치고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 무대에 오른 때는 바스티유에서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귀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더욱더 성숙한 음악인으로 성장하였던 결정적인 기간이었고, 세계 정상의 수준에서 활동하는 지휘자에게는 음악 외의 요건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기도 하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바스티유를 떠나면서 힘들었던 그때 나에게 보내준 우리 국민과 언론의 도움은 말할 수 없이 값진 것이었다.

이제 50줄에 들어서는 나이지만 지휘자로서 더욱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나아갈 시기는 오히려 이제부터라고 여긴다. 피아노를 연주하다 지휘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지휘자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나는 어머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너무나도 많은 분들의 사랑과 도움·지도를 받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 분들과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감사를 드린다.

무대에 나가기 전에 나는 꼭 기도를 한다. 한 연주를 끝내면 그 연주는 금방 잊어버린다. 그리곤 항상 그 다음 연주를 어떻게 준비하고 공부해서 더 잘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음악을 하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겸손(humility)이다. 메시앙 같은 인물이 그런 사표(師表) 중 하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더욱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는 길이고, 그동안 얻은 경험과 지식과 기술이 더 의미있는 우리 모두의 앞날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음악계의 여러분들과 힘을 같이하여 노력하는 길이다. 음악이야말로 나의 길이다.

(정명훈 / 프랑스 국립방송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연보

▲1953년 부산 출생.

▲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 2위 입상.

▲7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보조 지휘자(어시스턴트)로 활동

▲84년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로 취임. 뉴욕 필하모닉 등 객원 지휘.

▲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 취임.

▲89년 이탈리아 토스카니니 지휘자상 수상.

▲92년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으로 디스크 그랑프리 수상.

▲94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 사임.

▲95년 프랑스 ‘클래식 음악의 승리상(Les Victoires de la Musique)’에서 최고지휘자상·최고음반상·최고오페라 연출상 수상. ‘오텔로’(베르디)로 브루노 발터상 수상.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일본 데뷔 연주를 일본 평단이 ‘올해 최고 연주’로 선정.

▲96년 한국 명예 문화대사로 선임.

▲97년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호암상 수상. 로마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취임.

▲2000년 프랑스 국립방송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특별음악고문 취임.

▲2003년 역대 수상자 중 최초로 프랑스 ‘클래식음악의 승리상’ 두번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