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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탁기 사다

    2006.03.31 16:41

    석찬일 조회 수:1219 추천:30



    2006년 3월 29일

    나는 오전 7시경에 잠에서 깨어났다.
    자명종도 맞추지 않았으나, 아침 일찍 세탁기를 사러가야 한다는 생각때문인지, 일찍 눈이 떠진 것이다.
    그러고보니, 자명종을 사용하지 않은 지도 벌써 1년이 넘은 것 같다.
    처음에는 자명종을 안 켜고 자면 좀 불안하기도 하였으나, 자명종을 끈 후 며칠 지나고부터는 오히려 내 마음에 느껴지는 자유로움에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알디(Aldi) 슈퍼마켓에서 세탁기를 파는 날이다.
    내가 1999년 독일에 와선 산 세탁기가 그동안 별 탈없이 잘 작동하였으나, 지난 주부터 탈수할 때 굉장히 큰 소리를 내며 심하게 덜커덩 거렸다.

    혹자는 세탁기를 수리해서 사용하면 되지않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수리한다면 새로운 것을 사는 것보다 돈이 더 많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냥 어디가 고장났는지 봐달라고만 해도 출장비에 검사비 등으로 최소 50-100유로(한화 6만5천원-13만원) 정도 돈이 들고, 수리까지 한다면 왠만한 세탁기를 새 것으로 사는 값이 나온다고 하면 아마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나와 아내는 새로운 세탁기를 사기로 하고는 전자상가에 가서 어떤 모델이 좋은가 구경하고, 인터넷 쇼핑몰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지난 수요일에 알디 슈퍼마켓(이하 알디)에서 세탁기를 판다는 전단지를 보았다.
    그래도 이왕에 사는 것, 이번에는 좋은 것으로 사주고 싶은 내 마음에 아내에게 제일 좋은 것으로 사라고 권하였으나, 아내는 이렇게 저렇게 골똘히 생각한 후에 알디에 나오는 세탁기를 사기로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알디에 나오는 제품들은 대부분 유명메이커가 아니면서도 품질이 양호하며 가격이 싼 제품들이다.
    전자상가에 가서 사려고 한 세탁기는 모든 가정주부들이 원하는 Miele 세탁기인데, 그 세탁기는 가격이 대강 1500유로(한화 200만원) 정도 되는 고가의 세탁기였다.
    하지만 알디에 나온 세탁기는 가격이 300유로(한화 40만원) 짜리 세탁기로 초저가 세탁기인 것이다.

    세탁기 선전문구를 보면 에너지등급이나 탈수회전수에 용량까지 모두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세탁기여서, 우리는 알디에 나오는 세탁기를 사고는 남는 여유돈으로 다른 필요한 것들을 더 사기로 했다.
    (사실 그동안 독일에서 7년정도 생활하며 잘 써 왔던 가전제품들이 요즘 하나 둘씩 고장나기 시작해서 다 새로운 놈으로 사야하는 상황이다)

    나는 친구 세르게이에게 아침 8시까지 우리집 앞에 있는 알디에 와서 세탁기를 같이 사서 좀 날라달라고 도움을 청한 후, 알디로 향했다.
    알디는 아침 8시에 문을 열기에 8시에 맞춰서 나는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싸고 좋은 제품이 나오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면 빨리 뛰어들어가서 경쟁적으로 물건을 싸가는 전통(?)이 있는 알디이지만, 세탁기야 워낙 한번 사면 오랫동안 사용하며, 그렇게 수요가 없으리라 예상하고 천천히 여유있게 슈퍼마켓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슈퍼마켓 안은 그리 붐비지 않았다.
    나는 세탁기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세탁기는 한개가 남아있었다.
    그 때 시간이 8시 5분정도 되었는데, 한 개밖에 안 남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세탁기를 슈퍼마켓 바깥에 있는 주차장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지게차(?)를 빌리려고 직원을 찾아보았다.
    그 때 저 쪽에서 직원 한명이 지게차를 끌고 내게로 가까이 왔다.
    내가 세탁기를 실어갈 지게차를 빌려달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직원이 내게 말했다.
    "세탁기는 다 팔렸습니다."
    그 직원은 벌써 다른 사람이  와서 지게차를 빌려서 세탁기를 사가려고 해서 지게차를 끌고 와서 실어가려고 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아차, 한발 늦었구나.'

    나와 세르게이는 허탈하게 슈퍼마켓 밖으로 나왔다.
    세르게이는 다른 동네에 있는 알디에도 가 보겠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오케이 했다.
    사실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세르게이에게 미안해서 말을 못 꺼내고 있던 참이었는데, 세르게이가 먼저 말 해줘서 고마왔다.

    우리는 우리집에서 약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알디에 가 보았다.
    그 곳에도 벌써 세탁기는 다 팔리고 없었다.
    내게는 점점 큰 실망감이 다가왔다.

    하지만 왠지 한번 더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르게이에게 미안하지만 다른 곳 한군데만 더 가보자고 하였다.
    몇 달 전에 문을 연 건축자재 파는 곳인 호른바흐(Hornbach) 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알디도 문을 새로이 열었기에, 그곳에 가보기로 하였다.
    세르게이가 주차장에 주차하는 동안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보기 위하여 뛰어서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에 세탁기가 두개 보였다.
    단숨에 세탁기가 있는 곳에 다다른 나의 입술에는 웃음이 번졌다.
    잠시 후에 세르게이가 내 곁에 와서는 활짝 웃으면서 '드디어 찾았구나'라고 말했다.

    직원에게 말해서 지게차를 빌린 우리는 세탁기 한대를 지게차에 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 순간 우리 옆으로 누군가 후다닥 뛰어가더니 나머지 세탁기 한대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다.
    '5분만 늦었다면 아마 이곳에서도 못 살 수도 있었겠구나...'

    세탁기를 차에 싣고는 우리 집으로 왔다.
    아내는 샤론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러 가고 없었다.
    우리는 세탁기를 거실에 들여 놓았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45분이었다.

    세르게이는 오전 9시에 약속이 있었기에 우리는 서둘러서 세르게이의 약속장소로 갔다.
    세르게이의 볼일이 끝난 후, 같이 세르게이 차로 출근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

    2006년 3월 31일

    세탁기를 산 지 이틀이 지난 오늘 오전 연습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온 나는 세탁기의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열심히 충성봉사해온 세탁기의 전원코드를 뽑고는 급수호스와 배수호스를 분리했다.

    이제 새로 산 세탁기가 위치할 곳으로 잘 옮겨놓은 후, 급수호스와 배수호스를 잘 연결했다.
    그리고는 전원코드를 콘센트에 꽂은 후, 잠시 쉰 후에 저녁연습에 맞춰서 출근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서 보니, 아내가 새로 연결한 세탁기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마침 탈수가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어서 나는 잠시 세탁기를 쳐다보며, 빨래가 잘 되는지, 물은 새지 않는지 살펴 보았다.
    세탁기의 디스플레이에 END 라고 적혀나왔다.

    아내는 세탁기 문을 열어서 빨래를 빼내어 널면서 내게 말했다.
    "빨래도 깨끗하게 잘되고 탈수도 전에 사용하던 세탁기보다 훨씬 잘되네."

    좋은 세탁기를 살 수도 있었는데, 싼 세탁기를 사서 만족해하며 감사하는 아내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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